2023. 0310
새로 고등학교에 들어간 학생들이 펜팔이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기에 잠시 가만히 있었습니다. 하던 말을 멈추고 내 시선도 한 곳에 머물렀습니다. 대신 웃음을 지었습니다. 꽃잎처럼 공중을 날아가는 그런 웃음이 아니라 꽃가루처럼 어떤 바닥을 향해 떨어지는 웃음이 일었다가 역시 가라앉았습니다. 너희는 편지를 받아 본 적이 없겠구나. 수많은 것들로 세대와 세대를 가르지만 이처럼 냉정하고 보드랍게 갈라 치기가 되는 순간이 있을까, 싶었습니다. 편지가 어떤 마음으로 쓰는 글인지, 그것이 어떻게 전달되는 마음인지 알려 줄 길이, 길이 끊어진 지 사뭇 오래였다는 것을 끄덕였습니다.
편지를 씁니다.
편지라는 명사는 그런 분위기가 있습니다. 시키지 않아도 하고 싶은, 그 맛이 거기 들어있습니다. 시간이 남긴 주름을 펴고 사람이 너그러워지고 꽃이라도 될 것 같은 선한 입자들이 동동 떠다니는 순간이 마치 하나의 작품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콜라주 하는 것 같습니다. 하루라는 내 캔버스에 그 목소리가 전해주는 사연이며 스토리, 음악과 이름들을 채웠습니다. 그거 아세요. 가장 맛있게 들리는 데시벨이 있다는 것? 볼륨으로 조절하는 크기 말고, 사람이 내는 음감이며 성량, 거기에 떨림까지 그 모든 것들이 합쳐진 마법 같은 데시벨 말입니다. 나뭇잎을, 거룻배를, 바람을, 연인을, 버지니아 울프를, 마리 로랑생도, 하나씩 건네주는 그 손길이 다정했습니다. And to each season, Chris Spheeris의 Carino가 흘렀고 그리고 짐노페디도 있었습니다. 내일 또 올게요, 그 말도 캔버스에 붙였습니다.
옛날이야기를 해도 좋을까 머뭇거렸는데 사람들이 하나둘 '세상의 모든 음악'을 꺼내는 것이 내심 좋았습니다. 저는 그때를 말하지 않고 오늘을 이야기할 수 없어서 이거 참 다행이다 싶습니다. 안개 속이었습니다. 해가 떠도 사라지지 않는 안갯속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왁자하니 시끌벅적해도 모자랄 서른 그때였습니다. 그래도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어떻게 내게 불었던가. 날마다 들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음악을 들으면서 내일이 기다려졌습니다. 우울도 흔들렸습니다. 김미숙 씨에게 그 말을 하고 싶었는데 아무 인사도 못하고 말았습니다. 어느 청취자께서 '선한 영향력'이라고 말씀하시던데, 그 말씀에 동감합니다. 라디오는 늘 저에게 베풀었습니다. 저는 어디서나 라디오 하나만 준비하면 살 만하다고 여겼습니다. 예전에는 얼마나 많은 편지들이 방송국에 쏟아졌을까 상상합니다. 그 사연들에 공감하면서 자랐습니다. 음악이 소중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펜팔이라는 말은 배워서 알았던 말이 아니라 저절로 스며든 말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이 어제는 가난해 보였습니다.
새벽에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사실 매일 쓰고 있는 편지입니다. 오늘은 김미숙 씨에게 보내기로 합니다. 많이 고마웠다고 전합니다. 내가 아직 어리다는 것을 헤어지면서 늘 깨닫습니다. 먹먹하고 어쩌나 싶고, 밥맛도 잃습니다. 당분간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미리 마음먹습니다. 대신, 라디오는 집 같은 거니까, 집은 누군가 지키고 있어야 하니까, 추억하면서 거기 서서 멀리 바라보기로 합니다. 손때 묻은 음악들을 한 번씩 닦아주면 더 오래 빛이 날 테니까요. 고마웠던 것은 이렇게 간직하기로 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