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 / 서정주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그렇게 '내가´기다린 것이 아니라 ´네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너를' 기다렸던 것이 아니라 '나를' 기다렸던 시간 아니었을까. 스스로 기다리면서 누군가의 기다림이 되기도 하는. '나'의 '너'와 '너'의 '나'는 도대체 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지·····, 살기는 했었는지·····
가끔 누군가의 인생을 살고 있다. 초록바위*에서 참수된 그가 차마 다하지 못한 말을 흰 종이 위에 적을 때에는 머리 없는 귀신이 자근자근 내 정수리를 밟으면서 웃는다. 그러다가 명命을 재촉하지 말고 아서라. 저수지에 빠져 죽은 여자는 가슴이 없었다. 아니, 심장도 있고 창자도 있어야 할 몸통이 아예 텅 비었다. 허깨비처럼 서 있는 여자도 웃는다. 무엇이라고 쓸까요. 기다리다가, 기다리기만 하다가 세상을 등진 사람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어디로 가십니까, 이 길은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슬픈 사람, 어린 사람, 아픈 사람, 많이 늙은 사람, 칼 맞은 사람, 칼을 든 사람, 칼을 문 사람, 점잖고 예쁜 사람도 있다. 여기도 사람이 넘친다. 사연도 많다. 내가 마저 살아줄 사람을 찾는다. 그 영혼에, 내 영혼에 합合이 든 자字를 쓸 수 있는 자者를 찾는다.
그때까지 이렇게 앉아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먼지가 내 어깨를 덮고 바람이 그 위를 쓸고 세월이 거기 앉아서 나를 먹으리라. 천천히 음미吟味하리라. 그 맛이 묘妙하기도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