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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Aug 28. 2024

새벽 2시 10분

오래 쓰는 육아일기


예전에는 야외에서 불이 타는 것을 지켜보는 시간이 많았었는데···· 따로 '불멍'이란 말도 모르고 활활 타오르던 불꽃이 점점 사그라지는 것을 보고 있으면 괜스레 차분해지곤 했었다. 어둠마저 삼킬 듯이 이글거리며 항우장사의 기운을 뽐내던 불길이 그 좋던 힘을 다 잃고 소박해지면 왁자지껄하던 마당도 한순간에 정적이 감돌던 대학 시절 캠프파이어도 생각난다. 아직 덥다. 이 더위의 기세가 꺾이는 날이 오늘일까 오늘일까 바랐던 것이 마침내 옛날 불구경하던 일마저 꺼내놓았던 듯싶다. 더워서 깼는지, 자다가 깨는 일이 많지도 않지만 특별한 일도 아니다. 사람들은 잠귀가 밝다고 그러지만 내 그것은 밝은 정도가 아니라 늘 켜져 있는 것 같다. 만약 내일 아침 몇 시까지 무슨 약속이 있다고 하면 다른 어떤 알람보다 내 머릿속 그 알람은 더 정확히 그리고 확실하게 나를 반복해서 깨워준다. 일이 중요할수록 자주 깨운다. 잠에서 깨는 횟수가 내가 그 약속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준다. 나는 그때마다 황당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하며 약자弱者인 것을 깨닫는다. 초식 동물의 생존 본능 같은 것을 어둠 속에서 만지는 기분이 된다. 별 자랑거리가 없는 내 자랑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서른 명쯤 되는 군대 내무반 시절, 두 명씩 새벽 보초를 서는 일은 누구에게나 고역이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을 훈련소 화장실에서 처음 보고 나름대로 각오도 했지만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잠'이다. 잠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 부지기수다. 대부분 그 일들은 문제가 되고 문제가 되면 그것이 꼬투리가 되어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그 분위기를 타고 폭력이 자행된다. 깨워도 안 일어난다는 말은 '빠졌다'라는 말로 통하는 시절이었다. 깨워도 안 일어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고, 그 앞에 이런 말이 있어야 한다. '한 번에'.  그 인정머리 없는 한 번을 한 번도 지지 않고 눈을 떴다.  휴전선에서 제대하는 날까지.

나는 그것으로 사람이 보였다. '한 번에' 일어나는 사람과 그러지 못하는 혹은 그러지 않는 사람으로 나뉘는 세상에서 지냈다. 정말 사람을 곤란하게 하는 것은 내가 깨워야 할 사람이 나보다 고참, 즉 '선임'일 때 깨우는 입장도 곤혹스럽다. 깨워놓고 지켜볼 수도 없고, 실컷 깨웠는데 언제 깨웠냐고 심지어 정말 깨웠냐며 내가 안 일어날 리가 없다고 눈을 부라리면 똥 밟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진실은 저기 침묵하고 있다. 사실은 얼마든지 새로 구성될 수 있는 그런 경험 속을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다. 그럴 때 신神이 필요하다.

산이 일기를 쓰려는데 어쩌다가 불, 불 이야기가 나왔다. 산이를 기다리면서 불에도 길이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더위가 좀처럼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탓일 것이다. 이런 대목을 붙잡고 그 모양을 살피던 참이었다. - 그러니까 살아있는 것은 어떻게든 길을 내기 마련이구나, 기운이 뻗치는 방향이 길이구나. 힘이 붙으면 물도 불도 더위도 걷잡을 수 없는 거구나. - 올여름을 지내면서 더 자주 바깥을 두리번거렸다. 이 더위에 저 불볕 속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땀을 얼마나 흘릴까. 그 몸은 얼마나 상할까. 그렇다고 사무실 안에 있는 사람들이 좋아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한쪽은 열사병, 한쪽은 냉방병일 텐데, 우리는 더위를 부채질하며 더위를 원망하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다는···· 근원을 찾을 수 없는 심기증* 같은 것이 난다.

늘 그것이 궁금하다. 밤 12시가 지나면 한밤중이라고 부르지 않고 거기부터 새벽이라고 부르는 것이 과연 맞는지 내 감각은 그것을 어색해한다. 더 어둡지 않나, 아직 멀지 않았나 싶은 것이다. 무엇 때문인지 새벽이란 말은 내 감각 안에서는 '밝다' 그래서 밤 12시 30분을 새벽이라고 부르는 데 주저한다. 혹시 다른 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같은 편이다. 밤 12시는 어둠이 깊어질 수 있는 최고의 심연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깊다고 설정한 필요한 어둠 아닐까. 다음날도 살아야 할 운명에게 여기까지만 허용하자고 달래는 시간 아닐까. 계절이 옮겨가듯이 어둠의 밀도가 시시각각 달라지는데 12시는 여전히 12시다. 어쩌면 우리는 시간에 유동성을 발라주는 시도를 해야 하지 않을까. 다음 인류는 그런 시간을 발견해 내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현상이라며 관념투성이 시간에게 실습 과정을 이수하게 하지 않을까. 너도 눈앞에서 일어나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며 가르치고 깨우치면 학습 효과가 날까.

산이를 기다리면서 파헬벨의 캐논을 듣는다. 변주곡이란 제목으로 소설을 쓴 적이 있다. 이제는 나만 알고 있는 이야기, 다른 제목을 떠올렸어야 했는지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캐논을 들으면서 썼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냐는 물음에 쉽게 답은 하지 못했지만 어떤 장면들은 오래 남아서 나와 함께 나이를 먹고 있다. 12시로 가고 있다. 어둠이 묻고 어둠에 묻히는 문장들을 상상한다. 새벽으로 가는 여행을 꿈꾼다. 어느 역에 멈춰 있을까. 그대로 영원히 멈춘 것은 아닌가. 산이를 기다리는 시간은 아직 여름이고 아직 한밤중이고 아직 오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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