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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성당 /조용미

그것이 뜨악해서

by 강물처럼


용산 성당 / 조용미

사제 김재문 미카엘의 묘

​1954 충남 서천 출생

​1979 사제 서품

​1980 善終

​천주교 용산교회 사제 묘역

​첫째 줄 오른편 맨 구석 자리에 있는 묘비석

​단 세 줄로 요약되는

​한 사람의 生이 드문드문

​네모난 봉분 위에 제비꽃을 피우고 있다

​돌에 새겨진 짧은 연대기로

​그를 알 수는 없지만

​스물다섯에 사제복을 입고 다음 해에

​죽음을 맞이한 그의 젊음이

​내게 이 묘역을 산책길의 맨 처음으로 만들었다

​창으로 내려다보면 커다란 자귀나무 가지에

​가려진 그 아래

​내가 결코 알지 못할 어떤 사람들의 生이

​숫자들을 앞세우고 간략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들의 삶을 해독하는 데

​한나절을 다 보낸 적도 있다

​그는 이 묘역에서 가장 젊은 사람이다

​그의 죽음이 봄날을 오래 붙들고 있다

- "야, 눈 내리는 거 봐, 펄펄 내리네."

꼬맹이들이 무엇인가를 열심히 적고 있을 때 가끔 창가로 가서 도로에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것을 보다가 넌지시 혼잣말을 한다. 그 순간 내 말은 정말, '정말' 같아서 고개를 돌려 밖을 내다보는 아이들, 그중에는 또 속았다는 얼굴도 있고 에구 못 말려, 그런 표정도 있다. 나이는 같아도 여자애가 먼저 내 장난에 심드렁해지고 머리가 더 큰 아이들 순으로 흥미를 잃는다. 어제도 승우 혼자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일 년에 서너 번, 아무 때나 내리는 눈이 있다.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흩날리는 꽃송이, 눈꽃 송이가 있다····

대학생이 된 형이 원래 우리 손님이었다. 그 손님이 서울로 대학을 가고 승우는 엄마가 시키는 대로 영문도 모른 채 나를 찾아왔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손님이 된 초등학생 아이들이 몇 있다. 오늘 우리 사이가 좋았다고 내일도 그럴 거라고 믿는 것은 순진한 거라고 깨우쳐 주는 '앙팡테리블'*, 그 아이들 속에서 가끔 나는 공짜로 타임머신을 탄다. 나도 꾸러기가 된다.

"선생님, 선생님 진짜 미래를 볼 수 있어요?"

혼자 남은 승우가 나를 바라보던 그 표정으로 물었다. 금세 다 잊은 나는 물끄러미 아이를 쳐다보며 그게 무슨 말인지 기다렸다.

"아까, 눈 내리는 것이 보인다고 하셨잖아요."

아이야, 바닷가 모래알같이 고운 아이한테 미안했다. 한 번 더, 아이야, 옹달샘 같은 너한테 미안하다. 내가 거짓말 같은 장난을 쳐서 미안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고받는 것이 '소유 대명사'라서, 그것이 뜨악해서 미안했다.

어제는 더 재미난 일이 있었다. 그 전날 제니가 버려달라고 내 손에 쥐여주고 간 이것저것들 - 껌종이, 다 쓴 샤프심 통, 오래된 사탕, 쪽지들, 그리고 오만원이라고 쓴 종이돈 - 중에 오만 원 권만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깜박 잊고 있었다. 이번에는 도운이가 그런다. 가방을 챙기면서 "에효, 오만 원이나 가다가 주웠으면 좋겠다."

"자."

가볍게 주먹을 쥐고 도운이 작은 손에 슬쩍 건네줬다.

"어?"

다른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도운이를 향했다.

"어떻게 알았어요?"

아이들은 뜻밖의 말을 할 줄 아는 언어의 연금술사들이다. 내가 마주치는 그 예상 밖의 언어들, 생각들, 꽃송이들을 감상할 때가 있다. 창밖에 눈이 내린다는 말처럼 눈에 눈이 가득 보일 때가 있다.

"어떻게 내가 오만 원을 말할 줄 미리 알고 이렇게 일부러 만들어 놓기까지 했어요, 정말 선생님은 요술쟁이가 맞는 건가요, 아니면 어떻게 딱 이렇게 맞을 수가 있어요?" 그 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를 요술쟁이로 만든 것은 순전히 도운이의 말 한마디다.

"어떻게 알았어요?" 그 말 한마디, "선생님, 미래가 보여요?" 그 말 한마디.

예전에는 내 나이보다 일찍 죽은 사람들의 눈이 오래 기억에 남았었다. 살면서 잊지 않고 배우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나이를 잊는 것, 그래야 모든 것들이 편안하게 다가올 것 같다. 죽음도 삶도 사랑도 애증 같은 것도 포근해질 것 같다. 창밖으로 나부끼는 세월, 그게 내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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