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립스틱 / 이산하

시의,

by 강물처럼

붉은 립스틱 / 이산하



1945년 봄 유럽의 나치 수용소들이 해방되었다.

수용소마다 오물과 시체들이 썩어 흘러넘쳤다.

연합군의 확성기가 "You are Freedom"이라고 외쳤다.

전투기들이 공중에서 수용소 위로 구호품을 투하했다.

구호품 중에는 다량의 붉은 립스틱이 들어 있었다.

남자 죄수들이 배고프고 아파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지금 이런 게 무슨 소용이냐며 혀를 찼다.

그런데 립스틱은 식품과 의약품보다 먼저 동나버렸다.

다음날 아침 마침내 수용소 철문이 활짝 열렸다.

팔에 새겨진 죄수 번호를 립스틱으로 지운 여자들이

한껏 턱을 치켜들고 문 밖으로 나섰다.

그녀들의 붉은 입술이 아침 햇살에 눈부시게 반짝였다.





헤어지고서, 사랑하던 사람과 헤어지고서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고 묻어있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거 립스틱인 줄

그때 마셨던 커피에는 두 사람이 잘 섞여 흔들렸을까

입술이 환하게 피었다, 하던 그날은 봄날 같은 겨울이었을까

정말 빛 色이 비추던 너였을까


소고기 뭇국에 떠있는 저 묘한 것을 누가 볼까

살짝 건져놓는다

그 맛 좋은 것을 왜 안 먹냐고 앞엣 사람 머시기가

입에 넣고 질겅거린다

나는 맛을 모르고 그는 맛을 알까

나이든 립스틱 자국이 비늘처럼 빛나는 날은 숨길 수가 없다

오늘처럼 밥을 먹다가 아무 데나 떨어뜨리면

말릴 틈도 없이 누군가는 집어먹기도 하고


겨울 같은 봄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너는 입을 가져다 대면서 차라리 그것이 되고자 했던 내가 반짝였다

오늘도 나는 립스틱이 부리는 재주를 구경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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