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번역이 잘 된 책은 훌륭합니다.
어떻게 이 말을 그렇게 옮길 줄 알았을까 경탄을 할 때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석과 번역을 동색 同色으로 바라봅니다. 하지만 그 둘은 전혀 다른 종 種으로 분화됩니다.
풍경을 담는 모습이 그렇습니다.
하나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진을 찍습니다.
어느 쪽에 만족하느냐는 취향과 성격, 환경 같은 것들에 따라 달라집니다.
둘 다 있는 그대로 ´원문에 충실한´ 작업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면서 서로 다른 시간을 보냅니다.
해석은 사진처럼 빠르고 정확한 편이 비싼 가격을 받습니다.
번역을 해석처럼 하는 것은 무책임한 모습을 남깁니다. 그것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문장을 인간은 결국 동물이다는 문장으로 마무리하는 것과 같습니다.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이 없을 때, 마음은 있어도 몸이 따라가 주지 않을 때, 일단 그렇게라도 해서 낫기를 바라는 대증요법 같은 처치가 번역에서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감정과 느낌과 분위기가 제거된 유리 구조물 안에 놓인 풍경도 어디까지나 풍경이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기 때문에 풍경이 아니기도 합니다. 그래서 번역은 제2의 창작으로 불려도 충분합니다.
종교를 바라보는 타인 他人들의 시선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해석하고 싶어 합니다. 그 궁금증이 얕은 여울 같습니다. 연애 기사를 대하는 모습처럼 가볍습니다. 그마저도 해결해 주지 못하는 ´이론´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입니다. 번역을 해도 어려운 것을 요령 있게 그것도 재미나게 요량껏 설명해 줄 능력이 어디에 있을까 싶습니다. 점심시간에 한꺼번에 밀려드는 밥 손님들은 절대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어서 먹고 10분이라도 쉬어야 하는 사람들의 처지는 밥시간마저 전쟁 같습니다. 100년쯤 산다는 사람들이 10년쯤 사는 동물들보다 정신없습니다. 그러니 번역을 할 생각은 아예 처음부터 없습니다. 그것을 돈으로 어떻게 해결해 볼 심산인 듯한데 생각처럼 잘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직접 하는´ 번역은 숭고한 작업입니다.
향 香은 몸에 배는 법이고, 갖고 태어난 습성이란 것도 무지막지합니다. 분위기, 분위기 그러는데 환경도 무시 못 합니다.
그래서 번역을 할 줄 아는 것이 어떻겠냐고 묻는 것입니다.
세상의 소리를 담고 이른 아침의 맑은 기운 속을 거니는 것은 어떠냐고 권합니다. 그래서 울려 퍼지는 향 響이 된다면 비단옷에 錦上 꽃을 띄우는 添花 것입니다.
싸움이나 전쟁을 번역하면 어떤 모습으로 다시 펼쳐질지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종교심이 있습니다.
해석을 잘못하는 정도만 되어도 고칠 여력이 아직 있습니다. 하지만 오역 誤譯을 하면 사람도 사회도 국가도 위험해집니다.
오역 천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 요한 20:26
예수님의 텍스트 원문은 평화입니다. ´원문에 충실한´ 삶을 번역해 내는 일이 기대됩니다.
사람들은 손으로만 번역이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 손을 보여주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어느 때부터인지 손은 지위를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손을 애틋해합니다.
그림도 손으로 그리고 사진도 손을 가져다 누릅니다. 하지만 정말 멋진 일이 하나 남아있습니다.
´눈´으로 봐도 평생 지닐 수 있다는 것!
어쩌면 마지막 순간에 내가 볼 풍경은 내 ´눈´에 담아 놓은 그것일지도 모릅니다.
눈 目이 번역해 놓은 그것을 무엇이라고 제목 붙이면 좋을지, 그 즐거운 편지를 읽어내는 재미가 ´나와 함께´,
'너희와 함께' 또한 '우리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