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114

아침에,

by 강물처럼

´공기가 달라. ´


어떤 때 이런 말이 나오던가요.


분명히 공기는 무색 무취 무미합니다. 그런데도 공기가 다른 것을 느끼고 압니다.


심지어 그 맛이 다르다고 감탄합니다. 깊게 호흡합니다.


어떻게 알아보는 걸까요.



누가 나를 알아보는 일, 내가 그를 알아보는 일은 제로베이스에서 - 백지상태로 되돌려 놓고 - 시작할 수 없는 일입니다.


데이터에 해당하는 사실들이 정보가 되어 ´나´라는 형태를 갖춘 상태에서, 그러니까 최소한 내가 누구인지 구분할 수 있는 상태에서 - 일종의 호명 呼名 작업을 거쳐 - ´나´는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김춘수의 꽃에 나오는 것처럼 ´누가 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는 그에게 가서 그의 꽃이 되고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정보를 통해서 ´나´를 인식합니다. 표정, 음성, 냄새, 동작 등 수많은 자료들이 나를 대변합니다.


그것들이 훨씬 ´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사실이면서 그 사실들을 분리하고 결합시킬 수 있다면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나´는 언제나 지금의 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습니다. 말하자면 원소들의 이합집산 같은 것 말입니다.



과학은 자료를 통해 어떤 한 사람을 특정해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 같으면서도 또 다 다른 내가 과학에 의해 증명됩니다.


사람이 과학보다 더 나를 잘 찾아낼 수 있는 가능성은 사라졌는지도 모릅니다.


만약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감각할 수 있는 기능들이 상실되었다면 어떻게 그는 나를 알아볼 수 있을까요.


내가 누구인지 못 알아봅니다.


그렇게 세세하게 따져볼 것까지 없이, 나를 낳고 키운 부모조차 치매가 걸리면 나를 못 알아봅니다.



´알아보는 일´ 하나에도 강물이 흐릅니다.


촉촉하게 나무뿌리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이 하나 둘 무리를 이루어 땅을 적십니다. 수만 년을 볕에 누워서 지낸 돌 위로 거침없이 지나갑니다. 어느 날 강바닥이 되어 물이 흐르는 것을 실감하는 그것들은 어떻게 숨을 쉴까요. 흘러 흘러 무엇이 될까요.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요한 20:13



서로 몰랐던 시절로 돌아가는 일은 서운하고 쓸쓸하고 마음이 편하지 못한 일입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그 맛이 영 개운치 못합니다.


그것은 사람이 사람에게 던지는 돌이기에 괴롭습니다. 사람들 스토리에는 강이 흐릅니다.


퐁당퐁당 멀리 퍼져 가는 소리는 사람을 돕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을 몰랐다.> 요한 20:14



그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더라도 나는 그를 알아봅니다. 거기에 강물이 굽이칩니다.


거기를 돌아가면 강어귀에 다다릅니다. 물살은 완만해지고 알에서 깬 어린 넙치와 볼락들도 보입니다. 바다가 코앞에 있습니다.


부모가 나를 다 잊었어도 다 잊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식은 압니다.


죽더라도 그래서 영영 이별인 것을 알더라도 다 잊지 않을 것을 알고 잊히더라도 잊은 것은 아닌 줄도 압니다.


옛날 노래 하나를 듣더라도 그 사람의 모습, 눈동자, 입매가 생각나는 법인데 하물며...



과학이 나를 알아보더라도 그래서 그게 내가 되더라도, 그게 또 나라고 다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간직한 것들이 산소, 수소, 칼슘, 칼륨, 인, 나트륨, 마그네슘 같은 것들이라고 하더라도 ´강물이 흐르던´ 그 스토리 또한 내가 됩니다. 다만 정말 다행스럽게 ´나만´ 알아보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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