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거 있었습니다.
正.
하나씩 숫자를 챙기다가 쓱싹 해치울 때 쓰는 바를 정, 저 단정한 표지 標識.
그동안 지나온 날짜를 지워가며 그럭저럭 오늘도 버티고 싶을 때 몰래 적어보던 표시 標示.
그리고 남은 날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기대를 한꺼번에 품은 목표 目標, 그것을 바라보던 나.
여름을 세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부터 처서 處暑, 너무 힘들다 싶으면 입추 立秋까지만이라도 하나씩 세어가면서, 지워가면서 그리고 달래기도 하면서..
그렇게 가기로 했습니다.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 수적천석 水滴穿石의 힘을 간직하고 있는 것들을 살펴야 합니다.
한 걸음, 한 발자국 옮겨놓는 그 순간이 지금입니다. 무수한 지금의 힘, 수없이 많은 지금이 만들어 내는 움직임, 이동, 변화를 얼마만큼 체험하며 맛볼 수 있는지가 삶의 진정성을 묻는 항목이 될 것입니다. 물이 바위를 뚫는 것은 ´기적´입니다. 하지만 그 기적은 인간의 영역에서 얼마든지 탄생 가능한 스토리입니다.
스무 살 적에 헤르만 헤세를 무작정 읽었습니다.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누군가의 도서 대출 카드를 건너다봤던 날이었습니다. 그때는 그런 카드가 있었습니다. 빼곡히 적혀있던 책 이름들이 보기 좋았던가, 부러웠던가... 그랬습니다.
그 길로 도서관에 가서 카드를 만들고 나도 내 빈칸을 채워 넣기 시작했습니다.
그 맨 첫 장을 장식했던 헤르만 헤세를 서른 해가 지나는 동안 잊고 살았습니다. 내가 이렇게 나이 먹을 줄 상상도 못했습니다.
젊어서 읽어 좋았던 헤르만 헤세를 우연히 마주쳤습니다.
무엇보다도 뛰는 것이 있었습니다. 30년을 뛰어넘어 반가워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강아지가 깡충거립니다.
대출 카드를 만들까 싶습니다.
은행에 가서 만드는 것 말고 도서관에서 만드는 그것으로 젊어져 볼까 싶습니다.
건강 보조 식품이나 약을 달고 살아야 하는 나이인 줄도 알지만 남몰래 하나씩 적어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리운 이름들, 내가 미처 다 써보지 못한 이름들, 죽어서 별이 된 이름들.
- 모든 사람은 영혼을 가지고 있는데 자신의 영혼을 다른 사람의 것과 섞을 수는 없어.
두 사람이 서로에게 다가갈 수도 있고 함께 이야기할 수도 있고, 가까이 함께 서 있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들의 영혼은 각자 자기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꽃과도 같아서 다른 영혼에게로 갈 수가 없어.
만일 가고자 한다면 자신의 뿌리를 떠나야 하는데 그것 역시 불가능하지.
꽃들은 다른 꽃들에게 가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향기와 씨앗을 보내지.
하지만 씨앗이 적당한 자리에 떨어지도록 꽃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그것은 바람이 하는 일이야.
바람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이곳저곳으로 불어댈 뿐이지.
- 헤르만 헤세, 크눌프에서
쉰 살이 넘은 남자가 할 수 있고, 될 수 있는 가장 근사한 일은 무엇인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10년쯤 걸릴까요?
괜찮습니다. 100년이 걸린다고 해도!
그 답, 아시죠?
어디에 그 답이 있는지?
The answer, my friend, the answer is
https://youtu.be/Ld6fAO4id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