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김현승

시의,

by 강물처럼


이불의 고실고실한 느낌이 잠까지 맛있게 하는 계절입니다.

여기에서 더 지나면 날이 차가워지는 만큼 덮고 자는 것도 두터워질 것입니다.


그때는 따뜻한 쪽으로 감각이 기웃거릴 것입니다.


봄에는 살짝 고개를 쳐든 가슬가슬한 촉감이 몸에 감기고 지금처럼 가을이 한 걸음씩 몰래몰래 다가오는 시절에는 창창 마른 것들이 고스란히 눈에 밟히고 손에 들어옵니다. 이슬이 내리기 시작하는 백로 白露가 지나고 아침 기운이 한결 선선해진 날부터 가로수를 자주 올려다봅니다. 저 잎들과 가지들 사이에서 매미 소리가 연하게 흘러나오는 것이 무상 無常이란 말을 연상 聯想 시킵니다. 서로가 그렇게 이어졌습니다.



고대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현관 기둥에는 몇 글자의 말이 새겨 있었다고 합니다.


누군가는 그 말을 지나치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게도 새겨 넣었던가 봅니다. 새긴 것들은 오래 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디에라도 새겨놓고 싶은 것인지 모릅니다. 뒤에 남은 것들은 역사가 되기도 하고 자원이 되기도 하지만 처치 곤란한 쓰레기가 되기도 합니다. 역사보다 더 찬란하게 남아있는 그 말을 가을맞이하는 기분으로 적어봅니다. 여기에서 기다리다 하루쯤 더 멀리 마중하러 나갈 수도 있다고 혼자 웃어보면서 적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 ´



아는 것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그때마다 - 마치 중국의 가면술, 변검 變瞼처럼 - 다양한 표정을 짓습니다.


내 표정을 내가 모르고 지내는 일상은 피곤하게 조여오는 바지 같아서 불편합니다.


바야흐로 자연에 더 가까워지는 때가 찾아왔습니다. 서로 맨얼굴로 나서는 것처럼 편한 상대는 없을 것입니다.


맨정신으로도 얼마든지 - 3박 4일도 가능 - 속엣 이야기를 해대면서 취하지 않은 듯 취해서 걷는 일이 가을에는 가능합니다.



어제 배운 글자 중에 훤홍 喧鬨이란 말이 있습니다. 지껄일 훤, 싸울 홍. 시끄럽게 싸움.


때로는 물소리와 세월이 다투는 소리를 우연히 듣기도 합니다. 새와 나무들 사이에서도 시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물론 새와 새는 더 쌈박하게 다투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사람을 피곤하게 하지 않습니다. 시끄럽긴 한데 - 왜 그런 거 있을 겁니다. 매운데 자꾸 당겨! - 거기 머물면서 싸움 구경하고 싶은 곳, 그런 곳을 찾아다니는 것이 소박한 즐거움입니다.


미안하지만 사람들 싸움은 - 그것이 대통령을 뽑는 자리라고 하더라도 - 골이 지끈거릴 정도로 불편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일이 우리들에게 주어졌으니, 조물주 하느님은 우리에게 기대가 무척 크십니다.


말이 없는 것들이 말 많은 사람을 위로하는 길에서는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이끄는 상상도 가능합니다.


들보나 티끌로 눈이 먼 사람들이 아니라 마음을 소중하게 다루는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다 떼어주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무엇이 있을까 싶습니다.



일 많이 한 순서대로 그리고 구경하고 다닌 만큼 낡아가고 고장 날 내 몸의 것들입니다.


누가 나한테 수고했다고 그러듯이 나도 내 눈과 발과 손, 그리고 다른 모든 나를 이루는 것들에게 수고했다는 말, 언제쯤 정성스럽게 고백할지요.


그때에는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김현승 시인의 ´눈물´을 떠올려볼 것입니다.


그때에도 나는 나를 얼마나 알고 거기 서 있는지 새들은 묻지도 않고 날아갈 것입니다.


눈물 / 김현승


더러는

옥토 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 가지 않은

나의 천체 全體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작가의 이전글기도 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