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인년 첫 선물

아빠가 쓰는,

by 강물처럼

초등학교 6학년에 올라가는 아이들 넷을 차에 태우면 귀가 즐겁다. 대부분이 연애 이야기다. 아마 엄마, 아빠들은 잘 모를 것이다. 아이들이 연애에 얼마나 들떠있는지. 아이들의 안테나는 그쪽 하늘을 향해 있다. 수신된 신호들을 서로 떠들면서 흥분하고 소리치며 또 괴롭힌다. '너, 헤어졌다면서!'

예전에는 '내외했었는데'.

몰래, 은근히 상대에 대한 감정을 키우거나 주고받으면서 황홀해했었다. 속에 소중한 것을 감추고 조금씩 드러내 보이는 그것은 시적 詩的이었다. 단어 하나에도 주의와 집중을 기울여서 마음을 전하고 행간 行間을 읽을 줄 아는 솜씨와 숨은 뜻을 알아보는 눈썰미가 요구되는 것이 시를 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일까. 그 시절에는 어렸어도 그런 맛이 있었다.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오래 좋아하다가 겨우 터뜨리는 꽃망울 같았다. 그 느낌으로 편지를 적어 보냈다. 아니, 보내지 않았다. 아니, 못 보내고 말았다.

지금은, 지금은 좀 그럴싸하게 표현하자면 오렌지 샤베트라고 살살 시원한 맛이 혀 안에서 구른다. 아이들의 연애 이야기는 기대한 적도 없는 그 이야기는 내가 알던 연애담하고도 다르고 내가 동경했던 그것도 아닌데 코미디 빅리그처럼 시원시원한 재미가 있다. 웃음이 밑에 깔린 채 등장하는 같은 반 남자아이들 이름은 그 순간 강아지 이름처럼 가볍고 흥겨운 라임을 연발한다. 저것이 페미니즘의 목적 아닌가 싶은 현장에서 나는 채증을 해댄다. 증거를 잡는다. 그래도, 그래도 내가 목격 못했던 드라마, 순전히 브라운관으로 구경했던 다채로웠던 고깔, 맛깔스러운 색색의 회전이 연상되는 연애 이야기에 쫑긋거린다. 안테나를 키운다.

아, 연애는 멜로디가 다양하구나. 어린것들이 누군가를 동경한다. 키 커야 하고 잘생겨야 하고 거기다가 인성도 중요하다면서 저희끼리 희희낙락. 나는 들리지 않게 한숨을 쉬며 사거리에서 내 연애에 잠긴다. 히터가 따뜻하다.

거기에서도 울고 기다리고 설레는 감정선이 뉘였뉘엿 서산을 넘어가던가. 공백과 여백은 다르다. White Space의 저것은 백 白이다. 순수한 '흰'. 거기 어디에 빈틈이 있는가. 두려움과 놀라움이 제각각 고개를 든다. 속이 빈 것들은 두렵고 속을 비운 것들에게는 처연함이 인다. 공백은 기세 좋게 다가오더니 사람을 삼키고 여백은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지는 말고 누구 말처럼 다시 만나기로 한다. 우리 딸이나 딸 친구들이 커플 됐다는 이야기가 어렵사리 들리더니 일주일도 못 가서 헤어졌다는 꼬리표를 단다. 글쎄, 데이트는 해봤냐고 물어보기도 어정쩡한 사연을 냉큼 저희들끼리 다 까먹는다. 제리처럼 홀라당 포장을 벗기고 질겅질겅 씹으면서 재미있어한다. 우울한 것은 나뿐이다. 7번째 전 남친이라고 그러면 우습다. 그러면서 또 연상이 좋냐, 연하가 좋냐 한바탕 시끄럽다. 여자들이 이렇구나, 나는 지금 알았다. 고백이란 말도 1500원짜리 커피를 파는 가게 앞에서 떠드니까 어쩐지 어울린다. 지금 초등학생들은 고백을 채집한다. 유리병 안에 모은 종이학 같이 거기 모아진 고백들이 날아갈 줄도 모르고 질식한다. 앙팡 테리블.

연못에 개구리가 사라졌다. 양서류로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다.

산이가 테이블에 앉아 밥을 먹다 말고 꺼낸다.

'여자 친구 생겼어.'

한 달 전부터 낌새가 있더니, 드디어 공개다.

'그 친구한테 방해되지 않게 지내라.'

간단하고 담백하게 한마디만 건넸다. 걱정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걱정한다고 별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도와줄 것도 특별히 없다. 그런 말, '너는 괜찮은 사람이냐'는 말. 그 말을 다시 꺼내 줬다. 잘 입고 다녀라. 추우니까.

오늘도 초등학생들의 넋두리와 유쾌한 농담을 한바탕 들을 것이다.

재미있자고 한 말에 정색하지 말자, 집을 나서며 나는 마음을 다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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