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 소설,
집이면서 도서관
한창 바쁜 시즌을 보내고 모처럼 한가해진 강이는 문득 집에 가고 싶습니다.
집에 가서 도시 생활에 지친 몸과 마음을 충전시킬까 합니다.
처음으로 된장찌개가 뽀글뽀글 끓고 있는 거기가 떠오르는 것이 신기합니다.
매일 학교 식당이나 인근 가게에서 메뉴를 고르던 일도 오늘은 귀찮기만 합니다.
대충 짐을 챙기고 운전대를 잡고 출발합니다. 이렇게 쉬운 것을 그동안 까맣게 잊고 살았다는 후회가 밀려옵니다.
하늘색이 투명해서 그대로 음악도 켜지 않고 달립니다.
어제까지도 몰랐던 사실을 방금 깨달은 것 같습니다.
그라시아살라비다.
치즈에 살라미를 얹어서 마셨던 와인이 생각났습니다.
모처럼 맞는 휴식, 어디를 갈까, 어젯밤은 혼자서도 즐거웠습니다.
발길 닿는 대로.
어렸을 적에 자주 듣던 말입니다. 아빠는 잘 계시려나....
´뚝딱뚝딱´
벌써 몇 시간째 산이는 안에 있는 물건들과 씨름하고 있습니다.
햇살이 좋으니까 오랜만에 커튼을 떼어 세탁하자는 말이 신호가 되고 말았습니다.
도서관 대청소가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에 오면 몸을 움직이게 됩니다. 밥을 먹는 것도 산책을 하는 것도 옥수수를 따는 것도 음악, 해지는 것, 모두가 작업이 됩니다. 연구실에서 보내는 시간과는 다른 시간이 흐릅니다. 그야말로 정적으로 흐르는 시간을 산이는 이곳에서 경험합니다. 어릴 때 좋아하던 단팥, 그때 온 가족이 함께 본 어떤 일본 영화에서 그것을 ´앙´이라고 그랬었는데 그 말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앙´
입을 벌리고 혼자서 ´앙´ 그러면 달콤한 생각이 듭니다. 긴장될 때, 심심할 때, 문제가 잘 풀어지지 않을 때, 산이는 그때를 떠올립니다. 같이 둘러앉아서 영화를 보던 시절.
"대충 오늘은 방 하나만 치우자."
왜 아버지는 이름을 짓지 않았을까, 산이, 강이 그랬던 것처럼 분명히 무슨 이름이 있었을 텐데, 처음으로 산이는 궁금해졌습니다. 아버지는 오늘 아침에도 쓰셨습니다. 벌써 집에 온 지 사흘째가 되었는데 여전히 아침밥을 먹기 전에는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십니다. 오래 봐왔던 모습, 어릴 적에 잠에서 깨 방을 나오면 늘 아버지는 그러고 계셨습니다. 한 번도 그것이 무엇인지 읽어본 적 없는데 오늘은 꽤 궁금했습니다.
´도서관´이라고 팻말처럼 서있는 앞을 방금 빨간색 미니쿠퍼가 들어섰습니다.
"어? 오빠도 있었네?"
바삐 움직이던 사람들이 다들 멈췄습니다. 뜬금없이 가족 재회가 됐습니다.
미리 연락하지 않고 찾아다니는 것도 유전이라고 때마침 커피를 들고 나오던 어머니가 반가워합니다.
"그래, 무슨 일인데, 이 시간에 여길 다 왔어?"
강이가 꺼내든 가방을 받아 들면서 엄마는 궁금해합니다.
"갑자기 된장찌개가 먹고 싶은 거야."
그래, 맞아. 그럴 때가 있더라고. 산이하고 강이가 모처럼 풍경을 이뤘습니다.
그럼, 점심은 호박잎 쌈을 해서 먹자면서 엄마 얼굴이 싱싱해졌습니다.
"참, 그런데 정말 그게 다야?"
"뭐가 또 필요해?"
"학기말 중요한 것들 끝내고 이틀 정도 시간이 남는데 뭘 할까 그랬다가 책 보고 싶더라고.
봐야 할 책 말고 보고 싶은 책. 그런 거 말이야."
"먹고 싶은 밥, 걷고 싶은 길, 듣고 싶은 말, 그런 것만 골라서 하려고, 2박 3일 동안 쭉."
말이 좋아졌다. 강이는 늘 소재가 필요한 아이였다. 손에 잡히는 것 하나만 있으면 하루 종일 심심해하지 않고 시간을 다 보냈다. 철이 들면서 그렇게 골똘해졌다. 무엇인가를 묻고 무엇인가를 마주치면 오래 사색했다. 처음에는 시를 공부하더니 지금은 비교 문학을 전공한다. 곧 유학을 떠날 계획이다.
아버지는 평소처럼 커피를 마시면서 허공에 시선을 자주 흘려보냈습니다.
긴 머리카락을 뒤로 질끈 동여맨 것이 오늘따라 하늘색과 잘 어울립니다. 모든 색에는 빛이 감도는 것처럼 아버지는 흰색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도서관에 있는 무엇이든 아버지 흰머리가 비칩니다. 누가 보더라도 커피를 파는 곳인데 우리는 여기를 도서관이라고 부릅니다. 손님들이 커피를 마시는 공간에는 책이 없습니다. 거기에서 보이는 것은 큰 모과나무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 있는 마당. 그리고 그 마당 앞으로 멀리 뻗어있는 지평선. 무엇인가 보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본 것이 없는 공간이 우리 커피숍입니다.
엔리오 모리꼬네가 흐릅니다. 음악은 늘 아버지가 틀어줬습니다.
Once upon a time, 그렇게 시작하는 이야기들. 저 뒤에는 아름다운 공주가 살았다 말고 더 어울리는 말이 있을까.
사방으로 퍼지는 엔리오 모리꼬네의 선율들이 아무 약속 없이 마당에 선 네 사람들 머리에 앉았습니다.
아버지는 말이 없습니다. 말을 잃었습니다.
십 년쯤 됐을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부터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것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습니다.
말없이 말을 하는 아버지는 음악을 켜고 일기를 쓰고 커피를 마십니다.
신기한 것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불편해하지 않습니다. 원래부터 아버지는 그랬었던 것 아니었던가 싶을 만큼 익숙한 동작과 나날들을 지나오셨습니다. 아버지는 징검다리를 좋아하셨습니다.
산이와 강이가 어렸을 때에도 차를 몰고 다니다가 개울이 있고 돌다리가 있으면 거기를 건넜다.
강원도 정선에는 동강이 흐르고 그 근처로 조그만 냇물들이 흐른다. 시내를 따라 한참을 걸었던 어느 해 여름 사진이 아직 남아있다. 거기 징검다리를 뛰어넘던 아이들의 목소리와 그 건너편에 높다랗게 서 있던 느티나무와 흰 구름이 내게 남아있다.
왜 아버지 말이 들릴까.
산이도 피식 웃음이 납니다. 산이는 교토대에서 수학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수학을 전공하더니 지금은 수학을 연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일본까지 날아간 것은 순전히 영화 때문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봤던 영화들, 아버지는 일본 영화를 자주 보셨습니다. 사라지는 것들과 사라지고 없는 세상을 그 영화들이 보여줬던 것 같습니다. 가능한 편안하게 인식해 가는 흐름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수학이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이며 삶이겠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아버지와 교토에 가서 점심을 먹고 걸었던 길 위로 벚꽃이 수학 공식처럼 흩날렸던 날, 그때 산이는 삶이 숭고하다는 선언을 들었습니다. 일본에서든 한국에서든 그리고 아프리카 끝에서라도 연필 하나로 세상을 풀어가고 싶다는 감각이 꿈틀댔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말은 들립니다.
아버지는 지금 흐뭇하십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눈 밑으로 잔물결이 흘렀습니다.
내가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아무래도 그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깊은 강´
나는 종교도 문학도 밥 먹는 것도 문화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성당 안에 발을 디뎌본 적이 없었습니다. 결혼식도 성당에서 해야 한다고 그랬을 때 혹시 잘못된 결혼이면 어쩌지 싶은 생각도 있었습니다. 자기들끼리 좋다고 해서 다 좋을 수는 없는데 꽤나 일방적이다 싶었습니다. 물론 종교라는 것이 - 나 같은 사람이 아는 것도 없지만 - 인류 역사에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저도 대충은 알고 있으니까요. 믿느냐 마느냐, 그것은 죽고 사는 일 아니었던가요?
그런데 저도 성당에 다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애들 아빠는 성당에 다니라는 말도 건성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은 말할 것도 없이. 그런데 아이들이 커가면서 좋은 선생님을 갖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늘 따라다녔습니다. 그때 왜 하느님이 생각났을까.
애들 아빠가 젊어서부터 모았다는 책을 보면 심란했습니다. 그나마 나를 건드리지 않았던 것은 늘 그 책들은 가지런했습니다. 발밑에 걸린 적도 없고 먼지가 쌓여 보기 싫었던 적도 없이 이사 때마다 애들 아빠가 몇 날 며칠이고 혼자서 다 정리를 했습니다. 마치 자기 재산은 그것밖에 없다는 듯이 다른 사람의 손도 허락하지 않았으니까요.
엄마는 자기 몫으로 내온 커피를 강이에게 대신 건넸습니다.
늦게 결혼해서 운이 좋게 아들, 딸 남매를 뒀다고 우리에게 고마워하시는 엄마입니다.
엄마도 벌써 늙었습니다.
6월 말, 볕이 금방 따가워지는 아침 열한 시. 우리는 모였습니다.
다들 건강한 모습입니다.
"조금 있다, 점심 맛있게 해서 밥 먹자."
어머니는 목소리도 씩씩하십니다.
까르르.
학이 날아온 해는 길운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해는 액운이었다. 중학교 교과서에서 그 웃음을 배웠다. 학마을의 까까머리 아이들은 저렇게 웃었다. 뚝배기에 된장이 끓고 여린 호박잎에 쌈장이 보기 좋았다. 둘러앉으면 웃음이 달라진다. 산이와 강이가 까르르 웃는다. 밥이 나를 먹고 나도 밥을 먹는다. 지금이 영원이다.
점심을 먹고 잠깐 누웠던 거 같은데 강이는 볕이 한 뼘쯤 사그라진 것을 알았습니다. 초여름에 시골 오후는 한껏 고즈넉했습니다. 기지개를 켜고 밖에 나와 주변을 서성거렸습니다. 도서관에는 손님들이 앉아있고 사람들 움직이는 모습이 큰 유리창으로 잠깐씩 보였습니다. 깊이 숨을 들어마셨습니다. 이제야 첫 숨을 쉬는 것 같았습니다. 내음이란 것이 가득 채워지고 그만큼 사람이 부푸는 것이 좋았습니다. 나는 이 냄새가 좋아. 바람이 머릿결을 흔들었습니다.
도서관 안에는 도서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도서관에는 집이 있고 커피숍이 있고 도서관도 있습니다.
도서관하고 커피를 마시는 곳은 연결되어 있으면서 따로 떨어져 있습니다. 그 완충지대 같은 곳에 방이 있습니다. 가로로 긴 방에서는 영화를 봅니다. 아버지는 거기에서 음악도 듣고 친구분들이 찾아오면 그 방을 내어줍니다. 커피가 있는 도서관, 책이 있는 도서관, 음악 듣는 도서관, 그렇게 우리들끼리는 부르고 있습니다. 책이 있는 도서관은 아무도 없습니다. 강이는 거기에서 자랐습니다. 거기 창밖으로는 가지가 넓은 백일홍 나무가 있습니다. 분홍이 점점 예뻐지고 있는 나무 꽃입니다. 아버지가 배롱 나무라고 가르쳐줬던 이름이 좋아서 강이는 ´꽃이 피는 배롱´이라는 아이디를 사용합니다.
아, 커피향이 책방에 스며듭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아도 향은 사람을 찾아옵니다. 소리 닮은 남자가 있고 향기와 같은 남자가 있을 것입니다. 어느 때 음악이 들리기보다 맡아질 때가 있습니다. 슈베르트의 가곡은 분명히 낙엽 냄새가 납니다. 귀가 들리지 않은 베토벤, 꼬부라진 오른손 손가락을 가지고 연주하는 레온 플라이셔를 느끼는 것은 진동으로 알 수 있습니다. 감동과 감각이 황홀한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옵니다. 클레오파트라가 사방을 다 삼켜버리는 향기를 뿜고 배를 몰고 가는 나일강을 상상합니다. 그런 음악을 들었고 그런 향기를 맡으면서 그런 문학을 꿈꾸면서 살아갑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여기 있어서 좋습니다.
오빠는 아빠 대신이다.
´빠´는 무게이며 계급장이다.
아버지가 우리 어릴 때부터 가르쳐줬던 것이 두 개 있습니다.
´오빠 말 잘 들어라. ´
그리고 하나는 좀 웃깁니다.
´서울대학교는 껌이다. ´
오빠는 지금 뭘 하고 있나, 어머니는 아마 손님들 커피 내느라 바쁘실 것입니다. 아버지는 또.
도서관에 오면 다른 시간이 흐릅니다.
여기 올 때는 비타민인가 뭔가가 빠진 듯한 모습이었다가 여기에서 돌아갈 때는 용기가 생깁니다.
사람들이 보고 싶어지거나 일이 반가운 것은 아닌데 여태 해왔던 일들이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나를 응원하는 것을 느낍니다.
여기는 언제나 나를 응원해 주는 곳입니다.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면, 손길이 닿은 것이다.
하느님의 손길이 너에게 닿은 것이다. 축하한다. ´ 2001, 3.
2001년이면 우리가 태어나기 전이며 어머니, 아버지가 결혼을 하기도 전입니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책, 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 첫 페이지 빈 공간에는 아버지가 써놓은 메모가 적혀있습니다.
아버지의 ´너´는 누구였을까.
아버지 책에는 크로키 같은 메모들이 적혀 있습니다. 빠르고 간결한 그림, 우리는 그 그림들을 하나씩 찾아 읽습니다.
어머니는 그 책을 읽고 성당에 나가셨고 강이는 여기 있는 메모들을 모으면서 글을 썼습니다.
건축이나 우주, 군데군데 섞여 있는 수학 책에는 산이가 봤던 흔적들이 남아있습니다. 산이는 책을 베고 잠드는 것이 좋았습니다.
책방에서 자고 나면 그때마다 사람이 커진 것 같다고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것이 기분 좋았습니다.
2014.10.15
오늘은 강이 생일이다.
그러니까 강이가 5년 전에 오늘 오후 5시 5분에 태어났다.
세상에 태어났을 때부터 예쁜 아이였다면 사람들이 믿을까? 정말 그랬다.
주름이 하나 없는 얼굴에 까만 눈동자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별처럼 빛났다.
3일이 다 지나기 전에 오른쪽 눈 아래에 붉은 점이 생겨났고 그것이 커졌다. 별에 불이 켜진 것 같았다. 아직도 그때 사진을 보면 살짝 애처롭다. 다행히 돌이 될 무렵에는 감쪽같이 사라져 얼마나 안도했었는지.
강이도 산이 못지않게 건강하게 씩씩하다.
이제는 제법 아빠하고 대화가 된다.
요즘 자주 하는 말이 하나 있다. ´좋아하시네~´
무슨 말이건 아빠나 할머니가 엄마가 하는 말 끝에, 좋아하시네~ 그러면서 써먹는다.
이제 그만 씻고 자자, 그러면 그만 씻고 자자 좋아하시네~, 밥 먹어야지 그러면 밥 먹어야지 좋아하시네~
강이가 그럴 때마다 분위기가 재미있어진다.
누군가 그러는 것을 어디에선가 배웠나 보다.
강이가 무슨 선물이 갖고 싶다고 그랬었는데 그 이름을 잊어버렸다.
강이랑 같이 사러 가야겠다.
강이야, 생일 축하한다.
강이가 또 저 책을 집었다. 애들 일기를 썼다. 내가 살면서 유일하게 꾸준히 해본 일,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누군가를 지켜보고 그리워했던 일.
아버지가 쓴 일기를 펼쳤습니다. 언제나 강이 있고 산이 뛰놀고 있는 책입니다.
라디오에서 들었던 적 있는 사연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우리들 사진에는 아버지가 없습니다. 아버지는 사진에 없고 우리 안에 머물고 계십니다.
늘 맞은편에 서 계시던 아버지가 오늘은 많이 생각납니다.
마당에 불이 켜졌습니다.
가스등이라고 상상하라던 아버지 음성이 키 높은 정원등 주위로 둥둥 떠다니는 것 같습니다.
커피를 마시던 손님들도 하나 둘 사라지고 어둠이 깃들었습니다.
마지막 접시에 물기가 사르르 마르면서 우리는 한 데 모였습니다.
다시 넷입니다.
가운데 하얗고 예쁜 케이크가 놓였습니다. 불은 하나만.
어머니가 오늘은 불 하나 더 켜놓자고 그러십니다. 그러고 싶다면서.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음악이 빠질 수 없습니다.
그리스의 파란 밤하늘과 그 바다, 미키스테오드라키스를 아버지는 늘 안고 살았습니다.
매직 나이트 Magic Night, 선율이 흐른다.
아이들과 아내가 나를 기억한다. 오늘은 내 생일이다.
내가 태어나고 죽은 날.
네 사람은 둘러앉아 서로를 바라봅니다.
편안한 기운이 서로에게 전달됩니다.
비어있으면서 가득 찬 저 자리에 무엇이 어울릴까 하나씩 꺼냅니다.
나무야말로 적격이지 싶습니다. 아니야 별도 만만찮아. 그렇지 그런데 음악이라고 빠지겠어?
나는 커피 할래, 어머니는 작고 귀엽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는 아마 소설이라고 그러실걸.
아냐, 걸으라고 그러실지도 몰라.
풀벌레 소리가 졸졸 흐르고 있습니다.
내 이름을 부르는 저기에 나는 있다.
태어나면서 죽은 나는 매 순간 죽었고 그때마다 살았다.
아이들이 태어나는 날 나도 태어났으며 하늘이 푸른 날에도 태어났고 비가 오는 날 저녁에도 태어났다.
봄에는 바람 속에서 죽었고 여름이 오기 전에 뻐꾸기 울음을 들으면서 죽었다.
저 사람들이 토마토 소스를 듬뿍 머금고 바질 향을 입안에서 음미하면서 나를 떠들 때, 나는 곧장 태어난다.
슬퍼하지 않기.
일부러 그 말은 감췄다. 내가 가르쳐주고 싶은 것들이 무엇이었던가.
오늘 밤은 도서관에서 파티다. 나는 곁에 앉아있으며 여기에서 느끼고 있다.
"오빠, 커튼이 깨끗하니까 향기도 나는 것 같아."
커튼을 보면 그 생각이 납니다. 분명히 숨은 것은 나였는데 나를 찾으려고 살금살금 걸어오시던 아버지가 보입니다.
그때 내 조그만 발은 커튼 아래로 다 나와 있습니다. 나는 네 살쯤 되었고 양말도 신지 않았으며 돌돌한 바지를 입고 있습니다. 나는 두근거리며 눈만 감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무릎을 꿇고 내 옆구리를 간지럽힙니다. 나는 아차 싶으면서도 까르르 웃습니다.
아까 낮에 책 있는 방에서 이거 찾았는데, 다들 기억나는지 모르겠다며 강이가 앞에 내놓습니다.
´그 시절 우리가 본 영화들´
아버지가 만든 책들은 하나도 팔리지 않았습니다.
결혼한 지 스무 해 되던 날에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선물하셨다는 책 표지에는 우리가 함께 찍은 사진이 다른 영화 포스터들과 나란히 곁들여져 있습니다. 흑백으로 된 그 사진을 어디에서 찍었던가.
¶천둥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고 구름이 끼고 비라도 내리지 않을까.
그러면 널 붙잡을 수 있을 텐데.
무엇으로 좌절했던가. 그것은 아직 따뜻한가.
그때가 내 인생 전부에서 어느 지점이었는지 짚어볼 수 있을까.
영화를 봤다. 영화를 본 것보다 영화를 읽었다.
소설을 영화로 만드는 것은 흔한 일인데, 이 영화는 책으로 남는다.
그것도 프랑스식 연인이나 셰익스피어식 로미오와 줄리엣 같지 않고
책 냄새 짙은 고서점에서 찾아낸 만엽집에 나오는 한 줄 남은 연애.
다 사라지고 내가 사라지면 한 달쯤 혼자 거닐다가 사라지기로 하는
그날 거기 앉아서 지켜봤던 낮달과 저녁달, 그리고 자전거가 지나가는 풍경.
신주쿠 교엔을 내 발로 걸어서 찾아갔었다.
도쿄에 살다 보면 문득문득 녹색이 그리워진다.
녹차도 자주 마시고 집집마다 꽃이며 나무도 가꾸는데 아무래도 남의 나라였다.
위로가 좋기는 하지만 편하지는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때 나는 살고 싶었는가 보다.
200엔.
지금도 200엔일까.
30년이 되면 거기에 가보기로 한다.
내가 이코이 바쇼라는 말을 처음 배웠던 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쉼터라는 말은 짧다, 거기에는 숨이 쉬어진다는 느낌이 없어서 그 말을 대신하지 못한다.
신주쿠 교엔에 가면 숨이 쉬어졌다. 200엔으로 숨을 쉴 수 있어서 무한정 고마웠다.
그야말로 실컷 미도리, 녹음 綠陰을 주입시켰다. 혈관에 푸른 피가 돌았다. 나는 그녀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땅은 이름 없는 풀을 기르지 않는다.
거기 앉아서 이름이 흩어지는 것을 기다렸던가.
나도 맥주를 사고 초콜릿을 사 들고 비가 내리기를 기다렸던 것 같다.
도쿄를 떠올릴 때마다 비가 올 듯한 하늘이 머리 위에 걸린다.
그 방은 허물어지고 없어졌을 것이다. 4 조반짜리 다다미방에서 나는 숨어 지냈다.
허름한 이층짜리, 복도를 따라 방이 4개 있었던 고바야시 할아버지 소유의 별채.
비 그리고 풀.
비가 내리면 일이 잘 됐다.
야끼니꾸 가게가 붐볐다. 빗물에 젖은 손님들이 아는 척을 해왔다. 그들의 우산을 가방을 주문을 받았다.
나는 비 먹은 풀처럼 찬란했다. 계속 일을 하고 싶었다. 불빛 아래에서 나마비루 잇뽕 - 생맥주 한 병- 을 부르고 싶었다. 그리고 다음 날이면 신주쿠에서 내렸다. 거기는 풀밭이다.
도시의 소음이 등 뒤로 날아오르면 귀여운 구석이 있다. 삐뽀 삐뽀 경광등 소리도 한가로워진다. 여름에도 거기에 있었다.
누군가 영화를 만들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나는 이러다가 가을, 겨울쯤에는 어떻게 될까 싶었다.
소년은 구두를 만드는 꿈을 꾼다.
다시 태어나면 음악을 하고 싶었는데 그 순간 구두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두가 부러운 것이 아니라, 저 발이다. 저 자세다. 내 평생 가져본 적 없는 무지개 같은 표현이다. 구두를 한 번만 만들고 싶어졌다. 날개옷처럼 만들고 싶어졌다. 아마 나도 거기 앉았을 것이다. 일본식 정원이 내 단골이었으니까. 벚꽃이 피었던가, 벚나무 잎에 물이 들었던가. 이파리마다 사연을 담아도 좋겠다. 거기 한 글자씩만 다 써놓아도 긴 고백이 되겠구나. 아, 나무여. 나무 같았던 여자여.
15살의 다카오와 27살의 유키노.
구두 그리고 고전 문학, 비가 오는 날 그리고 교엔.
유키노가 했던 말이 그대로 잘 들렸다.
心のよりどころを失ってしまった。
나도 그랬다.
나도 만엽 萬葉에 그려볼 것이다.
1년 동안 거기에서 살았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은 다 들었다. 새소리, 빗소리, 천둥소리, 바람 소리, 휘파람 소리, 진공까지. 그래도 사랑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보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ㅡ 언어의 庭園
"우리, 우리 가보자."
어머니가 또 생기 있어졌습니다. 생기가 도는 어머니 말은 쉽게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대답도 하기 전에 어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가 모아둔 노래 시디를 고르십니다.
엄마 닮은 노래 그리고 우리가 부르고 싶은 노래, 사람들은 자기 고유의 것들을 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가르쳐준 말이 저기에서 흘러나옵니다.
Let it be.
산이도 눈에 빛이 감돌았습니다. 강이는 이런 것이 너무 좋습니다. 살아있다는 황홀감이 연주되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 악기가 되어 건반이 되었다가 현이 되었다가 울림, 울림, 울림.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