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빠르게 가는 사람과 천천히 걷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대로 놔두고 보기로 했습니다. 둘 다 세상에 필요한 사람들이니까요.
1929년에 태어난 이생진 시인이네요. 마흔 나이에 등단을 하셨으니 말하자면 구경하실 것 다 하시면서 시를 쓰셨네요.
그리운 바다 성산포, 너무나 잘 알려진 시의 주인이시잖아요.
섬과 바다를 평생 옆에 끼고 바람 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다녀 본 시인은 말합니다.
나는 살아서 낙원에 다닌 셈이다. 그는 볕 좋은 데 묻혀 조용히 바다를 듣고 바라보는 어부들의 무덤 옆에서 낮잠을 자고 일어납니다. 그리고 앉아서 멀리 시를 적어냈습니다.
시인이 바라다본 그 섬에는 지금 누가 살고 있을까? 공연히 만난 적 없는 그들이 그립습니다.
평생 사람이 그리워서 섬을 찾아 나서는 시인의 연애 시를 한번 엿보고 싶어 졌습니다.
그에게 사랑은 또 어떤 모습일까요?
있었던 일 / 이생진
사랑은 우리 둘만의 일
없었던 것으로 하자고 하면
없었던 것으로 돌아가는 일
적어도 남이 보기엔
없었던 것으로 없어지지만
우리 둘만의 좁은 속은
없었던 일로 돌아가지 않는 일
사랑은 우리 둘만의 일
겉으로 보기엔 없었던 것 같은데
없었던 일로 하기에는 너무나 있었던 일
어떠세요? 이별하고 힘들어하는 여자가 떠오르지 않으세요?
일부러 길을 돌아갈 줄 아는 마음에게도 여지없이 사랑은 그를 기다렸다가 그에게 업힙니다.
그러나 후회도 원망도 없습니다. 그래야 사랑했다 할 수 있으니까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처음 순결하게 반하는 순간이란 미상불 찰나적입니다. 그것이 이치인가 봅니다.
탄생의 신비는 짧고 그 앞에서 긴 여정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의 일생도 늘 그렇듯이.
누군가를 제대로 사랑한다는 것은 겉에서 시작한 환희가 속에서 꽃을 피우는 일이니까요.
꽃을 피우는 일은 아무나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더 잘 깨닫게 되는 일이잖아요.
그러면서도 묻지는 않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대신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그 사랑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어디쯤에서 이 사랑이 멈출 것인지를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그렇게 좋고도 아픈 마음으로 모두를 품에 안아 냈을 때, 나는 사랑을 믿게 되겠지요.
그런 다음 영혼에 조각을 새기듯이 없었던 일로 하기에는 너무나 있었던 사랑이 되어 있겠지요.
사랑이 많은 시대에 살고 있다고들 합니다.
당신이 지금 만나는 사랑도 사랑입니다.
하지만 어제 당신이 만났던 사랑도, 그리고 언젠가 또 다른 사랑이 찾아오는 날에도 그때에도 당신은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없었던 일로 사라지는 허허로운 것 말고 세상 소풍이 끝나는 날에 자분자분 싸들고 갈 만한 사랑이기를 바랍니다.
영혼에 새기는 조각들도 결국은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되는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