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달력 / 김광규
TV 드라마는 말할 나위도 없고
꾸며낸 이야기가 모두 싫어졌다
억지로 만든 유행가처럼 뻔한
거짓말을 늘어놓는 글도 넌더리가 난다
차라리 골목길을 가득 채운
꼬마들의 시끄러운 다툼질과
참새들의 지저귐 또는
한밤중 개 짖는 소리가 마음에 든다
가장 정직한 것은 벽에 달린 달력이고
거짓말 하나 안 하고 사는 것도 지키기 어렵다.
그러려고 그러는 것이 아닌데 그러고 산다.
하루 평균 5잔을 마시던 사람이 작심하고 커피를 끊어봤단다.
손이 떨리고 졸음이 오고 피곤하고 금단증상이 많더란다.
커피를 마시지 않은 첫 달은 괴로웠고 3개월까지는 커피의 막강한 영향력에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6개월째 되니까 그런대로 편안해졌고 1년쯤 마시지 않다 보니 생각이 나지 않게 되었단다.
그래서 커피 없이 살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립다고 고백한다.
거짓말 없이 살면 거짓말도 그리워질까.
금단증상은 찾아올까.
손이 떨리고 졸음도 오면서 가슴이 벌렁대고 그럴는지.
그것들보다 거짓말이 사라진 사람은 어떤 색으로 말을 꺼내놓는지 궁금하다.
새빨간 색은 아닐 것이고 시커먼 색도 아니라면 새하얀 빛처럼 환한 색으로 그와 그녀는 말을 하고 사는 걸까.
그와 그녀가 사는 곳은 세상이라고 불릴까 천국이라고 불러야 할까.
사막을 사람 앞에 펼쳐놓아도 건너려는 것이 마음인데 끝없이 푸른 바다를 보여주고 어쩌란 것인지 아무도 말이 없다.
유혹은 죄가 걸어 나가는 레드카펫이라서 나 같은 것은 밟아서는 안 되는 길인지 물어볼 사람도 없다.
나에게 세상은 유혹이다.
거짓말도 커피도 바다도 밥도 소설도 외로움도 아이들도 드라마도 하늘도 건강도 돈도 명예도 성공도 술도 당신도.
*'생사에 주住하지 않고 열반에 주하지 않는다' 했지만 이 중에 과연 적당히 건너다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이든가.
가장 정직한 것이 '달력'이라고 말하는데 내 달력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날짜들을 보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기는 어렵다.
바다처럼 커피처럼 달력도 가만있었기에 유죄다.
지켜보기만 하는 너희들은 모두 방조범이다.
아니다, 그것도 괘변이다.
좋아서 마시는 술을 말린다고 그만 마시겠나.
짧게 입고 길거리를 지나는 여자가 언제나 말썽이라고 떠드는 꼴도 볼썽사납기는 매한가지다.
어차피 세상은 살아남는 것들의 궁전이다.
바퀴벌레도 그쯤은 안다.
유혹 같은 것쯤이야 갖고 놀다가 버릴 줄 알아야 사람 노릇하고 살 수 있는 것이다.
그게 싫으면 마음먹고 건너가 보는 것이다.
사막을 건너본 사람에게 삶에 대해 떠들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럴 맘도 없다면 조용조용 살면 된다.
마치 세상을 무소유하는 것처럼.
달력에도 꿈처럼 달콤한 많은 날들이 숨어서 밖으로 튀어나올 날만 기다리고 있다.
나 같이 흔들리는 물고기는 언제라도 달력에 표시된 대로 낚이고 말 것이다.
고요한 사냥꾼들은 더욱 노련하고, 노련한 만큼 사냥감을 놓치거나 놓아주는 일이 없다.
내가 중독이 되지 않으면 그들은 조여 온다.
우리가 만나는 지점은 돌아가기에는 멀고 앞은 보이지 않는 그런 곳이겠지.
거짓말은 차라리 꼬리라도 흔들면서 제 갈 길 가는 것이 그래도 쫓기는 뱀 같아서 동정이라도 간다.
우리는 모두 취학 전 아동들일지도 모른다.
학교에는 다녀본 적 없는 어른이라고도 좋다.
한밤중 개 짖는 소리나 꼬마들의 시끄러운 다툼질 정도가 머리 아프지 않고 듣기에 좋다.
세상의 모든 해석은 좀 배웠다고 그럴싸하게 떠드는 속된 말이다.
죄인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싸놓는 똥이다.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을 인용하면서 글을 맺자.
'투철한 양심과 웅숭깊은 마음은 번민과 고통을 피할 도리가 없다. 내 생각에, 진정 위대한 인간은 이 세상에서 가없는 슬픔을 느끼는 것이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