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08, 토요일
그게 참 신기했습니다. 어떻게 할머니는 안 보고도 다 알지? 그랬습니다. 할머니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엄마도 대단했습니다. 나중에는 아예 어른이란 어른은 모두 그런 줄 알았습니다. 어른이 되면 애들이 어디에서 뭐하고 노는지쯤은 꿰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중에서도 불장난을 하고 집에 들어오면 꼭 첫눈에 붙들려버렸습니다.
너 불장난했지? 이렇게 묻는 것이 아니라, 너 어디에서 불장난했어? 그러면 깜짝 놀라면서 뒤가 켕깁니다. 꼭 나쁜 짓을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불장난 자체가 혼날 계제 階梯로 충분했습니다.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미나리꽝 근방은 썰매를 지치는 아이들과 불 쬐면서 장갑이며 양말을 말리는 아이들로 번잡했던 날이었습니다.
아내가 퇴근하면서 알타리 무 총각 김치를 얻어 왔다며 풀어놓았습니다.
어머니가 아프시면서 가장 먼저 바뀐 것이 계절 김치를 먹지 못하게 된 일입니다. 그 계절의 김치라는 것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50년 넘게 맛보고 살았으니까 고마운 줄 알아야 하는데 아쉬움이 먼저 고개를 내밉니다. 처지에 맞게 살아야 하는 것을 어머니는 자신도 모르게 일러주고 계시는지 모릅니다. 하여간 부모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세상을 떠나고서도 자식을 위합니다. 이렇게 저렇게 흐르는 상념에 손을 씻고 한 입 베어 물었습니다. 대추 하나에 태풍도 천둥도 벼락도 몇 개*라고 그러던데 입속에서 하얗고 까만 밤들이 까무룩 쓰러집니다. 별이 지나고 해가 맴을 돌고 달이 떴던가요. 얼굴 모르는 사람들도 서넛 웃었던 거 같습니다. 무밭으로 나비라도 날아오면 어쩌나 싶었는데 라디오가 켜졌습니다. 입에서 귀로 내 행복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김치 담그신 분, 말주변은 없을 것 같아."
한쪽으로 부려진 다른 짐들을 챙기던 아내가 허리를 펴고 눈을 크게 뜹니다. 어, 맞아요!
나는 흥이 나서,
"대신에 사람들 하는 말에 잘 웃고 이야기 잘 들어주는 분일 거 같은데, 말하자면 표정으로 말하시는 분."
아니, 어떻게, 왜, 라는 말들이 불꽃놀이처럼 순식간에 피었다가 가뭇없이 사라졌습니다. 말한 사람도 말을 듣고 있던 사람도 스르르 놀랐습니다. 내가 치는 점 占은 조금 시 詩처럼 들렸습니다. 아니, 시를 점괘처럼 풀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라디오가 그 순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라디오도 먹먹해지는 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김치 한 가닥이 그러는데 하물며 음악이 나오고 사연이 넘치는 라디오야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대목은 이랬습니다.
¶어머니의 오래전 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다. (흔들리는 듯 아닌 듯 목소리가 떨었습니다. 어? 하는 생각이 들던 찰나) 단발머리에 교복을 입고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는 어린 여학생을 보면서 속으로 울었습니다. (내가 잘못 들었구나 싶었습니다) 이로부터 십여 년 뒤에
-역시 말이 없었습니다. 말이 사라지고 배경으로 흐르던 음악만 울렸습니다. 지금 저 너머에서는 어머니와 아들이 오랜만에 만나고 있는 거 같았습니다. 10초가 지나도 20초가 지나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라디오 속의 남자 진행자도 무김치를 씹던 나도, 아무 영문도 모르는 아내도 가만있었습니다. 정말 좋은 방송이구나. 내가 이 방송을 오랫동안 듣고 있어서 좋고 앞으로도 더 들을 수 있을 거 같아서 다행이었습니다. 마음을 적시는 멘트가 아무 말도 없이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나도 들었어요, 라며 언젠가 그를 만나면 엄지를 꼽아 보이고 싶습니다. -
그리고 이로부터 십여 년 뒤에 아버지 같은 사람을 만나서 결혼할 줄 알았을까. 이십여 년 뒤에 나를 낳았을 걸 알았을까. - 세상의 모든 음악에서
차분하고 다정한 음성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매무새를 바르게 하고 말쑥하게 그 뒤를 다 마쳤습니다.
알면 보인다는 말이나 자세히 보면 예쁘다는 말이 코스모스처럼 살랑거리는 저녁이었습니다.
10월은 밤도 낮도 새벽도 다 가을 같습니다. 하늘도 땅도 바다도 가을을 차려입고 있습니다. 한껏 머리도 빗어 올리고 어디 좋은 데라도 다녀올 모양입니다. 여기 이러고 있다가 가을이 가을을 타면 저라도 도와줄까 싶습니다.
* 장석주 대추 한 알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