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20-1

여시 如是

by 강물처럼

2022,1014, 금요일


칠목재에서 함라산으로 오르는 길은 눈을 감고도 따라 그릴 수 있습니다. 차를 몰고 20분이면 고요한 세상에 가 닿습니다. 코끝에 감기는 공기가 달라지면 늘 똑같은 말을 합니다. ´나오길 잘했어. ´ 맥주도 첫 잔이 맛있듯이 산에서 마시는 공기도 첫 한 모금을 무념무상으로 폐 속 깊이 들이마십니다. 미세먼지와 코로나로 괴롭기만 한 폐가 겨우 숨을 쉬겠다며 반가워합니다. 네가 좋으면 나도 좋다. 폐가 좋아하면 피가 뜁니다. 통통 발을 구르며 일제히 마라톤 경주에 나선 것처럼 활기를 띱니다. 그러면 또 들을 수 있습니다. ´역시 좋아. ´ 누가 하는 말인지 주위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때부터는 다 좋아, 입니다. 사람들이 달려 달려 달려 달려, 그러면서 한 잔 해를 연거푸 외치는 것처럼 산에 있는 모든 것이 나 하나를 돕습니다. 나 하나를 위해서 딱따구리가 목탁을 두드립니다. 그 소리를 가만 듣고 있으면 불경이라도 한 줄 외우고 싶어 집니다.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저는 여시 如是라는 말이 좋습니다. 여시 같다 그러면 여우 같다는 말이라서 별로인데, 여시 如是는 ´그렇다´는 말입니다. 뜻은 그 뜻인데 그 소릿값보다 동작성이 탁월한 말입니다. ´끄덕거리는´ 장면이 여시라는 말의 생명입니다. 장면, 모습이어야 합니다.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보고 그렇다, 흐르는 물을 보고 그렇다, 도로 한복판을 오가는 차들을 보면서 그렇다, 일체를 합하기도 하고 일체를 빼기도 하는 그렇다, 입니다.




각각의 언어에는 번역되지 않는, 마치 사람들의 번역을 거부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예전에 그런 칼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그럴 때 ´나의 살던´은 내가 살던으로 바꿔야 하는데 바꿀 수가 없다. 아마 작사가 이원수 선생이 일본어 교육을 받아서 더 그렇게 썼겠지만, 그것을 알고도 바꾸기는 어렵다. 한국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내가 살던과 나의 살던이 어떻게 다른지, 입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속으로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렵기도 하지만 그래서 평화롭기도 해야 합니다. 회색 지대가 넓을수록 흑백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불편해합니다. 모 아니면 도, 이런 식이 좋고 간결하고 편하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위험합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전쟁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 아니면 도라는 말을 바꿔 말하면 죽기 아니면 살기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인문학이 좋습니다. 회색을 넓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회색을 기회주의자라고 보는 것은 흑과 백의 입장입니다. 그것이 이데올로기이며 진보니 보수 그러면서 꼬리표 붙이기 하는 작업입니다. 정체라는 말 대신 스탠스 Stance (입장, 태도)라는 말로 온건하게 표현하고 살벌하게 편을 가릅니다. 점점 더 미세해질 것입니다. 흑은 흑으로 더 분열되고 백은 백에서 나누어질 것입니다. 선명한 것이 아니라 차별적인 것이 됩니다. 양극화는 더 심한 양극화로 갈라 치기 될 것입니다. 두루뭉술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사과는 애플 apple이 맞습니까. 언어를 배우는 아이들이 수학처럼 공부하면 더 배우지 못합니다. 답답해서 견디지 못합니다. 뉘앙스를 깨우치지 못하는 언어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상황을 읽지 못하며 뜻을 옳게 전달하지 못합니다. 사고가 나고 사건이 터지고 싸움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덜 분명해졌으면 합니다. 사람이 하는 말로는 사람이 하는 생각을 다 표현하지 못합니다. 거기에 희망이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아무리 갈고닦아도 말은 언제나 부족할 것입니다. 나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거기에서 종교도 과학도 예술도 우리의 미래도 공존할 수 있습니다.




마라탕을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마라탕은 어떤 맛이냐고 물었더니 놀랬습니다. 좋아하는데 어떻게 말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그것이 정답이었습니다.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마음, 그 마음이 주렁주렁 열렸습니다. 가을은 그런 계절이어서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