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03, 목요일
통영에 사는 분입니다. 그리고 저와 같은 강 씨 성을 가졌습니다. 나머지는 모릅니다. 잘 묻지 못했던 아이가 잘 안 묻는 어른이 된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저는 물을 만한 것을 묻지 않는 습성이 있습니다. 묻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것들이 많은데도 대충입니다. 듣고 싶은 것이 없는가 싶습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늘 그렇게 진행됩니다. 내 삶이 그렇듯 관계에서도 끈질긴 구석이 없습니다. 사람한테 그렇고 나 자신한테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애정도 없이 무관심한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면 전달이 될지 확신은 없지만 관계를 느낍니다. 지금 잘 지내고 있다, 지금 힘들겠다, 그 정도 느끼며 지냅니다. 그런데 그것은 맞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 좋은 점이 하나 있습니다. 내 속도에 맞는 인사와 관심은 늘 거기 서 있는 나무처럼 일정합니다. 우리는 피톤치드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마시고, 관계 안에서 아무렇지 않게 지내는 일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5년이 되고 10년이 되고 심지어 20년이 넘는 관계에서도 발전하지 않습니다. 관계의 발전은 무엇인지 아예 그런 부서를 마련해 두지 않았습니다. 대신 나무처럼 저도 모르게 자랍니다. 하늘로 자랍니다. 고여 있지 않고 흐르고 있습니다. 바람이 통하게 무엇인가를 열고서 내다봅니다. 혹자는 창보다 문이 되겠다고 그러고 자그만 창이라도 내겠다고 그러는 시인도 있습니다. 무엇이 필요할까. 내가 맺는 관계에 무엇이면 족할까.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나무처럼 말입니다.
사람의 속도와 나무의 속도는 달라서 계산이 맞지 않습니다. 나는 나무를 느리다고 표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빠르다고 말하면 좋아할 사람은 좋아하겠지만 나무와 비교해서 빠르다 그러면 쓸데없는 소리가 됩니다. 정도에는 속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게도 있고 시간과 횟수 같은 것도 포함됩니다. 사람의 사랑은 깊고 빠릅니다. 나무는 오래갈 뿐입니다. 사람은 알려고 하지만 알지 못한 채 사라지고 나무는 알게 된 것을 화석으로 만들어 놓고 떠납니다. 그래서 서로를 애틋해하는 구석이 있습니다. 사람은 나무를, 나무는 사람을 위로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책은 그 나무의 헌신입니다. 사람은 그것을 넘기면서 자랍니다.
통영에 사는 그분에게 이러저러해서 아침 묵상을 처음 소개했던 날, 생각납니다.
"몇 번 보내고 말 것 같으면 아예 보내지 마요."
사람이 쓰는 글을 보면 어쩔 수 없이 사람이 거기 투영되는 것을 알고 계시는지요. 그렇지 않으려고 조심해도 사람이 비칩니다. 그러니까 글은 함부로 입으면 안 되는 너울 옷 같은, 천사 옷 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투박하게 썼더라도 속되게 썼더라도 숨어서 머리카락 보일까 조마조마해하는 어린아이가 글 속에 있습니다. 저는 그 말이 피곤한 아침이면 떠오릅니다. 쓸 말이 없을 때에 언제 한 번 꼭 써먹겠다고 벼른 적도 있습니다. 오늘이 그날이 되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얼마나 세월이 흘렀을까요.
여전히 시는 잘 쓰고 계시는지, 모르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 모를 만큼 많습니다.
오늘은 안녕하시냐고 묻습니다. 저도 꽤 성장한 것 같습니다. 많이 늦어서 그렇지만.
아침이 바빠질 시간입니다.
11월은 잘 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