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39-1

딸이 취직했다는

by 강물처럼

2022, 1105, 토요일


저녁 늦은 시간에 휴대폰이 울렸습니다.

반가운 이름이 보였습니다. 사람으로 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는 생각이 그 순간 스쳤습니다. 좋으면서 혹시나 하는 불안이 동시에 불이 오르듯 확 번졌습니다. 몸이 아프고 건강하지 않은 분들은 가지 끝에 매달린 잎새처럼 아스라한 데가 있습니다.




"강 선생님"




누가 나를 이 반가운 한 획 한 획으로 부르는가.


그와 나 사이에 장막처럼 내렸던 어둠이 해리 포터가 부리는 마법처럼 걷혔습니다. 동시에 편안해졌습니다.




"늦었지요? 내가 자랑할 것이 있어서요."




그의 자랑, 나는 그의 자랑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대접받는 일보다 무시당하는 일이 더 많습니다. 하지만 속으로 삭이는 사람입니다. 미안한 말을 꺼낼 때, 그리고 오늘처럼 자랑이라도 할라치면 먼저 웃습니다. 그가 웃는 웃음소리는 여백이 많습니다. 거기에는 새만금처럼 땅이 된 바다의 표정이 있습니다. 아빠로 사는 데 힘들이지 않는 거룩한 애정이 있습니다. 나는 그를 만날 때마다 하나씩 그 마음을 빼어 먹습니다. 갈빗대보다 그 마음이 맛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딸아이가 밥 먹고 싶다고 하면 이제 서울까지 가야겠어요."




누군가의 딸이 취직했다는 말을 들으면서 내가 고마운 것은 무엇일까, 손가락으로 빈 책상 위에 동그라미를 그렸습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딸에게 축하를 건네고 싶습니다.


아빠가 이야기해 줬습니다. 아빠는 나하고 산을 오르면서도 딸한테 늘 달려갔고 식당에 들러 밥이 맛있으면 딸이 밥을 먹었을까 나한테 물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몸이 좋지 않은 아빠가 아파서 누웠을 때도 ´딸´ 걱정만 되더라고 웃었습니다. 아빠 웃음소리 알고 있지요? 멋쩍고 미안해하고 고마워하는 그 3종 세트 웃음소리를 장착한 삶, 그 사람이 아빠여서 축하합니다.




그리고 슬픔, 슬퍼하면서도 살아가야 할 슬픔들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있습니다. 바다에 배가 좌초되고 물에 가라앉으면 작은 나무판자 하나라도 잡아야 살아날 수 있습니다. 나는 슬픔 가운데 동동 떠다니는 그것을 희망 같은 거라고 여깁니다. 그것은 청소 일 수도 있고 한 끼의 식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나에게 남아 있는 것, 그것이 결국 나를 살립니다. 아빠는 딸, 딸은 아빠 손을 잡고 지금을 이겨냈다는 것을 축하합니다. 여기를 지나가는 수많은 방법 중에 가장 사소하지만 가장 오래가는 빛을 간직한 그 손이 보기 좋습니다. 다이아몬드보다 찬란합니다.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루카 16:11




중 3학년 아들에게 친구들이랑 재미있게 놀고 너무 늦지는 마라는 메시지를 점심 먹기 전에 보냈습니다. ´넹´ 이런 글자 해석하기가 어렵습니다. 마침 통화를 하고 있을 때 아이가 돌아왔습니다. 옆에 와서 꾸벅 인사를 하는 것을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친구가 좋을 때인 것 같습니다. 방금 헤어지고 와서 통화를 하는 것이, 나도 그랬었던가 돌아보게 합니다. 잊을 만하면 생각나는 영화, City of joy, 인도를 배경으로 했던 그 영화에서 나왔던 대사를 적어보겠습니다. 오늘도 좋은 날입니다.




인생에는 세 가지 선택이 있다. 도망치든가, 방관하든가, 부딪치든가.


사람들은 이 대사를 기억합니다. 내가 따로 남겨둔 대사는 이것입니다. 작은 판자 조각 같아도 사람을 살리는 말입니다.




딸의 결혼 지참금을 겨우 마련한 아빠가 결혼 전날 밤에 딸에게 말합니다.


"신이 내게 맡긴 것을 맡았을 뿐이다. 그 역할을 얼마나 잘했는지는 모르겠구나."


앞 문장은 영화의 것이 확실한데 뒤에 쓴 문장은 확신하지 못하겠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