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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Nov 23. 2022

기도 54-1

인내였습니다.

2022, 1123, 수요일


나는 무엇인가 찾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찾지 못할 것입니다. 찾으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관심이 없기를 조심합니다. 찾으려는 의지가 찾겠다는 목적을 갖지 못했습니다. 의지와 목적이 한 팀을 이뤄야 그것이 월드컵이든 천국이든 해탈이든 얻을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나는 이것을 존중하고 싶습니다. 이것도 하나의 선택이 되었으면 합니다. 목적 없이 의지로 떠돌았으면 합니다. 목적 없이 흔들리는 깃발도 있었으면 합니다. 목적 없이 먹는 밥도 먹을 만하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목적 없는 일이기를 바라고 내가 걸었던 길은 길이 아니었다고 적습니다. 다만 안개가 짙은 꽃밭을 지나온 듯 방향 芳香만 내게 묻혀서 나아갔으면 합니다. 공중에 물기가 떠있으면 소리도 냄새도 퍼지지 못하고 아우성칩니다. 잠시 멈춰서 기다립니다. 날아가지 못한 것들이 내게 가라앉도록 몸을 내줍니다. 안개에 젖습니다. 내가 멈췄던 곳이 꽃밭이었던 것을 먼 데에 와서 돌아봅니다. 바위에 앉아 젖은 것들을 바람에 맡깁니다. 바람이 내 대신 축축해집니다. 고마워하는 것도 없고 미안한 것도 없습니다. 저도 무엇인가에 기댈 것입니다. 바람은 몸을 갖지 않고서 자기에게 기대는 것들에 어깨가 되어 주고 팔이며 등이 됩니다. 한 번쯤 바람이 기대는 나를 기대합니다. 그럴 수 있다면 등을 맞대고서 바람이 잠들 때까지 기다려주고 싶습니다.



인간의 8만 4천 번뇌는 8만 4천 장의 법문으로 다스릴 수 없음을 가야면 伽倻面 치인리 緇仁里 해인사 海印寺 장경판고에 있는 대장경은 8백 년 동안 침묵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사람과 함께 나란히 숨을 쉬는 대장경을 떠올리는 아침이 있습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루카 21:19



인내를 얻어 입을 수 있을까, 얻어 신을 수 있을까, 지팡이처럼 짚고 갈 수 있을까. 등불로 삼을 수 있을지 묻고 싶어서 그 앞에 서성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삼키는 것입니다. 삼킬 줄 아는 인내여야 생명을 얻습니다. 내 생명은 인내가 살립니다. 인내는 내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고 잎사귀와 꽃, 열매를 맺습니다.



¶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작은 열매도 맺을 수 없듯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그러하리라.


- 요한복음 15: 5



96년 12월, 도쿄 타워가 보이는 대사관 거리, 미나토구 港区 아자부주반 麻布十番에 있는 千園. 한국의 인기 연예인이나 정치가, 재벌가의 사람들이 단골로 찾은 한국 식당에 계은숙 씨가 늦은 시간 찾아왔습니다. 열두 시가 다 된 시간이어서 식당은 한가했습니다. 어디선가 저녁을 먹고 술을 한 잔 마신 분위기였습니다. 거기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두 달이 겨우 지난 터라 몰라봤습니다. 먼저 일하고 있던 다른 아르바이트생들이 반갑게 그녀를 맞이했습니다. 자리에 앉지도 않고 금방 식당을 나갔습니다. 엉겁결에 ´저 사람이 계은숙이야´ 그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계은숙 씨도 저를 제대로 본 것은 아닙니다. 안면이 있는 다른 아르바이트생, 둘하고 잠시 짧게 몇 마디 주고받은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때 그녀가 우리에게 했던 말이 지금까지 생생합니다.



"오늘 돈 많이 벌었으니까, 우리 고생하는 한국 사람들끼리 돕자고."



단골손님이었기에 그 후로도 종종 식당에서 마주쳤지만 고맙다는 인사는 따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날 그녀는 우리들에게 수고한다며 5천 엔씩 건넸습니다. 그때 시급이 900엔 정도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액수도 액수였지만 지나는 길에 일부러 ´우리 같은´ 사람들을 챙기는 그녀가 스타처럼 보였습니다. 가끔 그녀의 소식을 인터넷으로 검색합니다. 궁금해서가 아니라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찾아봅니다. 연예인들의 가십 gossip이 기사화되어도 그녀를 응원합니다. 곧게 뻗은 도로에서 만난 것처럼 손을 흔들어 주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들떠 있던 그녀의 표정에서 내가 본 것은 화려한 조명도 아니었고 콘서트에서 번 돈이나 명성도 아니었습니다. 일본에서 살아가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들 열심히 살고 있구나, 다들 애쓰고 있구나. 그것이 ´인내´였다는 것을 이제야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 표정이 잊히지 않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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