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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Nov 25. 2022

기도 56-1

다시 월드컵

2022, 1125, 금요일



카타르 월드컵 우리나라의 첫 경기를 봤습니다. 어깨가 저절로 들썩거렸다가 가끔 엉덩이가 바닥에서 뜨기도 했습니다. 우리 편이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잠이 싹 달아나고 분투하는 선수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온전히 바라보면서 4년 전 러시아부터 멀리는 94년 군대 제대를 앞두고 휴전선에서 봤던 미국 월드컵까지, 내 머릿속에 있던 주마등 走馬燈 하나에 모처럼 불이 켜졌습니다. 시절이 그림처럼 흘렀습니다. 어제는 밤이 길었습니다. 2002년 포르투갈 경기는 그중에서도 이상합니다. 박지성 선수의 결승골은 연속적이지 않고 동작 하나하나가 초 단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멀리 날아오는 공을 가슴으로 트래핑하고 - 이상하다고 여기는 지점이 여기입니다. 믿지 않겠지만 그의 가슴에 공이 닿는 순간부터 마치 정해진 코스를 도는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처럼 모든 동작이 자연스러웠습니다. 심지어 야무지게 입술을 무는 표정까지도 각본 그대로였습니다. 찰나이면서 그 순간은 동시에 영원처럼 길었습니다. 감각하는 1초들이 우리 생에는 있습니다. 분절적으로 쪼개지는 몇 초의 생 生이 간혹 펼쳐질 때가 있습니다. 그날 내 감각은 1초씩 앞을 먼저 보고 뒤를 돌아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다음 왼발로 슛을 쏘는 것을 봤으며 공중에 뜬 그를 보며 그의 탄력이 이만큼 좋았었나 감탄하는 여유도 있었고 그 공이 골이 되는 것을, 거짓말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1초 앞에서 봤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환호성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거기가 어디였는지 다른 것은 전혀 떠오르지 않습니다. 어디에 다녀왔던 걸까요. 이탈리아 전이나 터키 전은 모두 동경 나카노구에 있는 작은 선술집이었습니다.




그때 했던 말은 지키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월드컵은 현장에서 보겠다며 호기롭게 떠들었던 나를 사람들 모르게 지워가며 살았던 20년이었습니다. 벌써 20년이나 됐구나, 싶어서 경기가 끝난 다음에 막 분재가 된 어린 단풍을 물끄러미 바라봤습니다. 맥주가 마시고 싶었습니다.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는다는데 내가 했던 말들과 행동들을 수거하러 다녀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나는 수비수였던가, 공격수였던가. 패스는 몇 번이나 했으며 몇 미터쯤 공을 몰고 질주했던가. 내가 했던 반칙은 용서를 받았던가. 나는 골을 먹었던가, 골을 넣었던가. 내 그라운드는 나를 무엇으로 간직하고 있을까. 다시 20년이 흐를까.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




늦지는 않았는데 늦을까, 시간을 들였습니다. 서두르면 차를 탈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다르게 도착하고 싶었습니다. 다른 데를 뒤적거리다가 생각이 가는 대로 따라다녔습니다. 어제 축구는 훌륭했습니다. 근사한 테이블에 초대된 여운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이겼으면 더 좋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2022년 우루과이 전은 여태 보지 못했던 경기였으며 앞으로 내 안에 불이 밝혀지는 날에는 그 빛에 비쳐 그림으로 흐를 것입니다. 사람들은 역사로 기억하겠지만 나는 전설로 다듬을까 합니다. 입체감을 입히지 않고 평면으로 말입니다. 매일 닦아야 광택을 잃지 않는 구리 반지 같은 것으로 말입니다.




11월이 유리창에 뿌옇게 번졌습니다. 밖은 좀 추워졌습니다. 나도 좀 추워질까, 생각합니다.


어린 단풍이 눈치를 줍니다. 두어라 일곱 매 푸른 이파리가 전부다. 창을 그대로 두고 밖을 내다봅니다. 차들이 바쁩니다.




¶ 우리는 나무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우리의 신체뿐만 아니라 몇몇 사유 방식이 그것을 말해준다. 우리는 나무로부터 얻은 목재의 속껍질로 책을 만든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앞으로도 나무에서 유래될 듯하다. 철학자 로베르 뒤마 Robert Dumas는 "우리가 나무를 떠난 적은 없다."라고 말했다. 나무는 여전히 우리에게 가르쳐줄 것이 많다. - 자크 타상, 나무처럼 생각하기에서.




나뭇잎을 떨구는 나무들 속에서 공을 차고 다니는 하루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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