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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Nov 27. 2022

기도 57-1

그 글씨 나에게 다오

2022, 1127, 일요일



거리낌 없이 한 획을 그었다. 그와 같은 풍경을 향합니다. 이상향 같은 곳이라서 닿지 않을 것을 압니다. 줄기가 바라보는 가지 끝이나 그 가지가 봐 뒀던 허공에 집을 짓습니다. 공중에 짓는 집에는 주소가 없습니다. 길이 없습니다. 내가 길이라고 하면 어떤 길을 떠올리는지요. 그 길이 아닙니다. 길이 있어도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그럴 수가 없을 것입니다.




어제 아침은 조금 분주했고 협소했으며 어정쩡했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거리낌 없이 거슬렸습니다. 하루가 바빴습니다. 그런데도 거추장스러웠습니다. 밤 10시가 지날 무렵에도 그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이라도 쓸까´


하나를 오래 계속하면 그게 옹이가 되고 옹이가 가지처럼 자리 잡고 그 가지 아닌 가지는 줄기를 바탕으로 삼는다는 것을 나를 보면서 생각합니다. 나는 무엇을 바탕으로 이끌려하는가. 묵상이나 기도, 복음은 배경인가, 벼랑인가.




6시에 일을 마치고 헝클어진 머리를 묶지 않은 채 저녁 미사에 갔습니다. 조금 어지러운 것도 있었는데 모처럼 ´모임´이 있어서 다른 것을 먹기도 그랬습니다. 남쪽 높은 곳에 별이 밝아지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차가워지고 있었습니다.


머리가 잘 묶어지면 기분이 좋습니다. 어디까지 머리를 기를까 생각하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대신 청소기는 자주 돌립니다. 그 와중에도 아침에 쓰지 않은 ´묵상´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깔깔했습니다. 그러면 안 되는데, 내가 주인이 되면 안 되는데 꾹꾹 삼켰습니다. 바람 같고 싶었던 사람들이었지만 바람은 되지 못했습니다. 사람이었으니까요. 줄기는 줄기, 가지는 가지, 나무는 나무로 그게 이상향 아닌가 싶습니다. 사람은 사람, ´사람´이라고 할 때 무엇이 떠오릅니까. 그래서 여기가 아니라 저기에 집을 짓습니다. 공중에 지은 집을 찾아올 사람은 누구입니까.




국정원과 경기도 교육청에서 지워졌습니다. 강원도 교육청에서도 신영복 선생의 손글씨가 지워지고 있습니다. 세월이 지운 흔적은 보물이 되지만 사람이 지운 흔적은 상처가 됩니다. 지워서 지워지는 것이라면 잊히기도 하겠지만 지워지지 않는 그 지워진 흔적은 누가 다독이고 치료할 것인지. 세월은 시간을 들여 아픈 기억을 먼저 가져갑니다. 기억이 빠져나간 집은 순순히 자기를 내어놓습니다. 먼지도 내지 않고 가뭇없이 사라집니다. 치유는 그렇게 일어납니다. 내가 했는지 세월이 했는지 누구 덕에 나아졌는지 모르게, 사람이 낫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마주친 그 방법은 길이 아닙니다. 살리는 길이 아닙니다. 계속 상처를 내는 일입니다. 왜 그러는지, 불안합니다. 자기 올가미에 자기 발이 엮이는 모습입니다.




¶ 성공회대 정보과학관 휴게실에 ´兼治別亂´ 겸치별란이란 액자가 걸려 있습니다. 내가 쓴 글씨입니다. 겸애하면 평화롭고(治) 차별하면 어지러워진다는 뜻이며 물론 묵자의 글에서 성구 成句한 것입니다. 묵자의 겸 兼은 유가의 별 別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 별 別이야말로 공동체적 구조를 파괴하는 가장 근본적인 해악이라는 것이지요. 나와 남의 차별에서 시작하여, 계급과 계급, 지역과 지역, 집단과 집단 간의 차별로 확대되는 것이지요. 가 家와 가, 국 國과 국의 쟁투가 그것입니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가장 큰 해악이 바로 서로 차별하는 교별자 交別者라고 묵자는 주장합니다. "큰 나라가 약소국을 공격하고, 강자가 약자를 겁탈하고, 다수가 소수를 힘으로 억압하고, 간사한 자가 어리석은 자를 속이고, 신분이 높은 자가 천한 사람들에게 오만하게 대하는 것 이것이 천하의 해로움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오늘날의 세계 질서와 우리 사회의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을 금치 못합니다.


- 신영복, 강의 376p.




그의 글씨를 갖고 싶습니다.


지우고 버릴 것이라면 나에게 주십시오. 두 손으로 받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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