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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Feb 17. 2023

기도 118-1

불안도 밥이 된다

2023, 0217,  금요일



통화가 계속되었습니다. 선배도 변했습니다. 시시콜콜 이야기가 많아졌습니다. 얼마 있으면 퇴직해야 하는데 그때는 뭐 해 먹고살지 막막하다는 푸념이 막 시작되려 할 때, 옛날이야기 한 토막을 꺼냈습니다. 학교 다닐 때, 형은 한문도 잘했었는데요. 그랬지, 어려서부터 아버지한테 맞아가며 천자문을 다 뗐으니까. 그러니까 방향이 달랐습니다. 형, 제가 보니까 고전이 그냥 고전이 아니더라고요, 한문을 알아가는 재미가 제법 있던데요. 내가 아는 정의로운 사람 중에 늘 상위권을 차지하던 형이었습니다. 하지만 삶은 겹겹으로 층을 이루며 흐르는 하나의 흐름입니다. 정의감이 전부를 표방할 수는 없습니다. 인물, 사건, 배경이 구성 요소가 되어 한 권의 소설을 완성하듯이 정의감도 도덕이나 양심, 가치관이나 태도를 견인하거나 지지하는 하나의 요소가 될 뿐입니다. 형은 이제 그것을 배워 어디에 써먹겠냐며 자격증이라도 따놔야 할 것 같다며 스스로 각성한 말투였습니다. 사람들이 저하고 이야기하면 선명하게 보이는 것들이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희미한 것들을 꺼내니까요. 그래서 자세를 바로잡고 태도를 노선을 분명히 하고 싶어 지는가 봅니다. 주식 할 줄 모르고 부동산 모르고 코인 모르고 또 재테크는 아예 꽝입니다.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재테크´라는 말을 우리나라에서 누가 처음 썼는지 아마 모르실 겁니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 분하고 딱 한 번 마주친 적 있습니다. 친구 매형입니다. 친구를 조용히 불러 그랬다고 합니다. 친구 잘 사귀어야 한다. 저런 친구 사귀면 안 된다. 그때 나는 다른 말도 하지 않았던 거 같은데 어딘가 짚이는 구석이 있었던가 봅니다. 그 여름에 밀짚모자를 쓰고 돌아다닐 일은 아니었던 거 같습니다.




저도 나이가 들었나 봅니다. 선배가 하는 말을 가만 듣고 있다가 불쑥 말을 꺼냈습니다. 저는 한 번도 ´조직´에 들어본 적이 없어서, 늘 불안했거든요. 병가라는 것도 없고 휴가라는 것도 승진, 월급 인상 이런 것들, 잘 몰라요. 벌판 있잖아요. 허허벌판이 펼쳐진 것 같은 느낌을 매일 느끼면서 지내는 거 같아요. 그래서 여전히 불안한데 따로 더 불안해하고 싶지는 않아요. 나이를 먹었나 보다, 정도로 그냥 그렇게 보여요. 불안도 밥이 되는 거 같아요. 체력을 키워주는.




선배는 말꼬리가 흐려집니다. 아, 그렇지? 너는 너대로 또 걱정이 있을 수 있지. 다시 또 통화하자고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형은 한문은 더 공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는 아마 내일도 책을 펼쳐 볼 것입니다. 돈이 안 되는 것을 하는데 용기가 필요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겁을 상실해 가는 듯합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데 저는 자꾸 무식해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걱정입니다. 그것이 재미있습니다. 그래서 요지경 속이라고 그러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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