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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Feb 25. 2023

기도 124-1

누룽지 끊이기에 좋은

2023, 0225, 토요일



누룽지를 끓이기 좋은 시간입니다. 혼자 깨어 있고, 다른 사람들은 자고 있습니다. 7시 30분. 시간을 느리게 연주하고 싶은 시간입니다. 나한테서 나는 소리는 볼륨을 최대한 줄입니다. 사뿐히 걷고 가볍게 키보드를 건드립니다. 사실 배가 고픈 줄은 모릅니다. 살짝 집중이 덜 된다는 느낌이 들면서 밥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다 경험입니다. 위가 없는 사람은 배고픈 줄 잘 모릅니다. 그쪽 신호 체계가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토요일이나 일요일 아침은 내가 알아서 챙기는 것이 현명합니다. 나는 사람들하고 좀 다르니까요. 누룽지가 고소하게 익어가고 있습니다. 살살 녹고 있습니다. 누룽지 끓는 소리에 거실에 있는 화분이며 책들이 깨어납니다. 나는 기분이 좋아집니다.




누룽지는 생각보다 빨리 요리가 됩니다. 다른 것들을 다 하고 볼 일이 아닙니다. 그러다가 정말 바닥을 박박 긁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도 할머니도 모두 ´누룬밥´이라고 그랬었는데 오늘 아침에는 그 밥이 먹고 싶다는 생각도 듭니다. 지금부터 맛있는 누룽지 먹겠습니다. 우선 찬물을 반 컵 다 끓인 누룽지에 붓습니다. 그거 아시나요, 겨울 높은 산에서 끓여 먹는 라면의 맛, 펄펄 끓었던 면발이 산바람 속에 퍽 안긴 순간에 요리는 최고가 되고 사람은 그 맛을 잊지 못합니다. 그리고 따로 한 국자를 퍼담습니다. 그릇이 예쁠수록 누룽지에서 품격이 돋습니다. 저는 물빛 탁이 도는 사기그릇입니다. 저는 저 빛을 광택이라 부르기보다 어쩐지 ´탁´ 그러고 싶습니다. 그것은 어느 시대의 말인지, 어디에서 온 말인지 저도 모릅니다. 이럴 때 이렇게 말하면 어울립니다. ´그냥´




맛있는 것이 맞습니다. 그냥이라는 말이 맛있었던 순간들이 나를 풍족하게 했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맞으려면 맛있어야 합니다. 내 삶이 맛있기를 누룽지를 먹으면서 바라봅니다. 무생채가 잘 어울립니다. 아삭한 식감이 입안에서 싹싹합니다. 그리고 보들보들하고 따듯하게 누룽지가 마무리를 합니다. 속이 웃습니다. 두 수저를 그렇게 먹다가 멸치를 한 마리 집습니다. 꼭 한 마리여야 합니다. 가능한 마른 멸치 그대로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좋지만 여의치 않으면 있는 요리된 그대로도 좋습니다. 아, 맛있습니다. 그러니까,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에서 짜파구리에 소고기를 넣어 끓이는 장면으로 자본주의를 놀렸던 것입니다. 그런 장치를 ´비꼬기´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입니다. 짜파구리에 소고기를 넣으면 짜파구리 맛을 구현하지 못합니다.




지리산 둘레길을 걷다 보면 어딘가에서 - 저는 알고 있지만 일부러 어디쯤이라고만 - 그동안 맛보지 못했던 맛을 볼 기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기껏해야 파전, 해물전, 부추전을 이야기하지만 곰취전이라고 있습니다. 엷게 곰취나물에 밀가루를 입혀서 부치면 그 맛이 또 일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겨울이어서 라면이 맛있고 봄이어서 곰취가 맛있던 것도 있지만 거기까지 걸어온 ´수고´ 없이는 절대 그 맛이 그 맛일 수가 없습니다. 나는 그냥이라고 말하지만 그냥이 그냥이려면 얼마나 많은 그냥 아닌 것들이 다리를 놓고 길을 만들었는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냥 쉬고 싶다는 사람에게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아, 누룽지를 먹는 사이에 봄이 왔습니다. 봄에는 봄이고 싶습니다.




강이하고 나눴던 장면을 동봉합니다. 당신의 봄날을 찍어 드리겠습니다. 찰칵~




"아빠, 엄마가 오늘 피아노 학원 마지막 날이라고 선물 사라고 했거든."




오늘이었구나, 알고는 있었는데 2월까지라고 해서 다음 주 화요일만 생각했었다. 차에 올라탄 강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여기를 강이가 1학년 때부터 다녔으니까 6년, 강이에게는 추억의 한 장소로 충분히 자리매김했을 것이다. 왠지 슬프다는 말이 어떤 때, 어떻게 나오는 말인지 알지 못하면서 중얼거린다. 선생님한테 레슨 받으면서 긴장했던 모습을 떠올렸을까. 친구들이랑 재미있게 떠들면서 건반 하나씩 뛰어다니던 순간을 떠올렸을까. 강이는 피아노를 좋아한다. 수학 학원에서 푸는 것과 피아노 학원에서 푸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고 그랬었다. 하나는 문제를 풀고 다른 하나는 무엇을 푼다는 뜻이었을까. 그렇게 풀린 것들 속에서 강이가 자랐다. 풀려서 고마운 것들, 기특한 것들, 쑥쑥 자랐던 것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거워하는 것만 못하다.´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 논어, 옹야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하버드, 스탠퍼드, 예일 대학교가 아니라 세인트존스야말로 미국에서 단연 최고의 지성적인 대학으로 일컬어진다. 다른 아이비리그에 비하면 평범한 학생들이지만 그 학생들이 4년 동안 부지런히 인문고전을 읽고 토론을 거쳐 지성인으로 거듭난다고 한다. 나는 산이와 강이에게 그와 같은 시도를 권하지 않았다. 언젠가 흥이 나서 논어의 한 대목을 떠든 적이 있었을 뿐, 연속적이지 못했던 것이 오늘에서야 후회가 된다. 강이는 피아노를 즐거워했다. 그래서 힘들이지 않았다. 아이가 가벼우면 부모는 덩달아 홀가분해지는 법.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하던 임윤찬*은 미국 투어를 하고 있다던데 우리는 서로 다른 길에서 투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강이가 연주하는 것도 나에게는 라흐마니노프로 들린다. 아빠는 네가 연주하는 것이 명곡이니까. 멋진 사람이 하는 연주가 당연히 멋지게 들린다. 나는 강이를 즐거워한다.




"그래서 마카롱을 사 갔거든. 선생님이 무척 좋아하셨어. 그리고 스무 살, 대학생 언니한테도 3개짜리 줬는데 언니가 자기는 준비를 못 했다고 편의점에서 이거 사줬어."




딸기가 장식된 조그마한 케이크가 앙증맞아 보였다. 오빠 하나 주고 너 두 개 먹으면 되겠다. 정말, 중학교에 가는구나. 그동안 해왔던 것들이 한번 정리가 되고 있다. 강이 가방도 옷도, 신발도 모두 몸을 바꾸고 있다. 강이는 책장이며 방 청소를 하느라 그동안 간직했던 동화책들도 모두 꺼냈다. 이제 그 책들은 다른 도서관에 보내질 것이다. 떠나는 일과 떠나보내는 일을 하나씩 경험하고 있다. 헤어질 때 잘 헤어지는 연습도 겸한다. 웃으면서 또 보자는 인사를 잊지 않기로 한다.




* 임윤찬 - 한국의 젊은 음악가, 2022년 제16회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를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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