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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Feb 26. 2023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영화 에세이

'나중에 다시 와야지.'

산타모니카 해변에서 석양을 바라보며 마셨던 맥주, 시즌이 지난 니가타 모래사장에 앉아 나지막이 불렀던 카와시마 에이고의 노래, 영광 원자력 발전소가 있는 어느 방파제 끝에서 몇 번을 들었던 Sailing.

I am sailing, I am sailing, Home again cross the sea.

I am sailing, stormy waters.

종교 같고 예술 같고 인생 같은 순간에 함께 했던 인연들이여, 안녕.

슬리퍼여, 티셔츠여, 머리카락이여, 안녕. 담배도 술도, 나였던 너여, 모두 다 안녕.

나는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 문이 닫혔던 것일까. 길이 끊겼던 것일까. 기억하고 있는 것들에게 기억만, 늘 기억만 보내며 산다. 사라지고 없는 것을 만지작거리는 내 기억들을 애도하는 시간, 나는 점잖게 견지하고 있다. 옛날과 지금과 내일, 이름 그리고 얼굴, 때와 장소의 구도를 잡고 쓱싹쓱싹 그리고 있다. 쓰면서 걸으면서 자면서 살면서 기억하고 있다. 손이 감각하기를, 내가 나를 몰라보더라도 너를 본뜨고 조각할 수 있기를. 나는 눈을 감고 손을 믿는다.

산이가 보고 싶어 하던 영화를 골랐다. 극장 개봉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요금이 비싼 편이었다. 우리는 아직도 넷플릭스가 아니다. 합리적이지 못하지만 불편하지 않아서 그대로 지낸다. 불편해하지 않는 것이 내 생활의 바탕색이다. 그 색은 비교적 푸르다. 물빛처럼 고요하면서 차갑다. 차갑지만 마실 수 있다. 컵에 떠서 잠시 기다리는 것을 여유롭게 간직한다. 영화를 봤다.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今夜, 世界からこの恋が消えても。


가정법은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잘 배워두도록 약속한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에는 사람들 마음에 그리고 언어에 '가정법'은 존재할 거라고. 가정법에도 시간이 있다. 재미있지 않나, 현재를 바꾸고 싶어 하기 때문에 가정법은 과거가 가장 많이 사용된다. 내가 지금 너라면, 내가 지금 부자라면, 내가 지금, 이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어떤 가정법을 마법처럼 사용하고 싶은가. 그대의 가정법이 불러내고 싶은 현재는 무엇인가. 이루고 싶은 것은 어떤 것인가. 거기에, 거기에 내가 좋아하는 말이 하나 더 붙어있는 영화 타이틀, 세상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나는 양보를 좋아한다. 양보하고 싶지 않을 때에도 양보가 된다. 감정도 미움도 성냄도 사랑도 양보가 된다. 노래도 양보가 되면 좋으련만, 음악은 나를 매정하거나 무능력자로 만들어 버린다. 넉넉해야 양보가 되는데 노래할 때 나는 초조하다. 언젠가 해가 지는 곳에서 그리고 그곳에서 부르고 싶은 것들, 영화를 보면서 하나씩 떠올랐다. 춤추는 기억들, 내가 된 기억들이 나를 춤추게 한다. 연애 스토리가 화면 가득 피어났다. 만나고 바라보고 약속하고 아이스크림을 떨어뜨린다. 그리고 생생한 웃음들이 둘 사이에 눈부셨다.


nevertheless,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부사를 좋아한다. 사라지는 것들, 깐죽거리다 사라지고 말 것들, 다 잊히는 것들을 입고 다니길 좋아한다. 그래서 말이 길어질 때는 내가 그 문장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신호이며 그 문장을 갖고 싶어 하고 그 문장을 오래 입안에 넣고 먼 길을 가고자 한다. 내가 되라고 톡톡 가슴을 쳐가면서 산을 몇 개나 넘는다. 나는 돌부리처럼 생긴 부사도 예쁘게 보고, 꽃처럼 향기가 나는 부사는 깊이 들이마신다. 나를 걸러주기를 기도하면서 내가 저 향기가 될 수 있기를 발원하면서. 그것이 양보다. Even if this love disappears from the world tonight.


내가 아는 일본어로 영화를 본다. 그러려고 그랬던가, 싶은 것들이 시간의 손가락 사이를 흐른다. 모래처럼 발밑에 쌓이는 밤이었다. 우리 아이들은 화면에 집중하고 나는 언어에 관심을 기울인다. 저 이름들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참았다. 참아야 좋아지니까, 영롱해지는 것은 진주만이 아니다. 나는 주인공들의 이름을 다시 적는다.

가미야 토오루, 神谷透, 토오루는 투명하다. 이름도 모습도 성격도 삶도 창 窓을 연상시킨다. 맑게 닦인 커다란 창, 내가 보이는 투명함이다. 마오리는 그런 토오루에게 비친다. 자기를 바라보기 시작할 때 변화가 생성된다. 둘은 연인이었으며 학생이었고 친구였으며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나는 귀인이라고 말했다. 흐트러진 주름을 너울거리는 흐름으로 바꾸는 바람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 예술이 예수로 흘러간다고 했을 때, 산이와 강이 엄마는 제법 심각하게 끄덕였다. 예술이 많아져야 사람들이 예수를 닮아간다고 나는 어느 날 아침에 열심히 떠들었다. 카미야, 카미 神는 일본인뿐만 아니라 누구나 알고 있는 존재다. 신이다. 어떤 이에게는 하느님, 어떤 이에게는 부처님, 모든 모습으로 형용될 수 있는 그 이름이다. 일본 영화에는 열차와 자전거, 벚꽃과 불꽃이 등장한다. 백 마디 문장으로도 장면 하나를 다 소화해내지 못하는 것이 어느 나라에나 있다. 뜨거운 뚝배기를 마시면서 시원하다를 연발하는 우리를 누가 감히 해석하겠는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이나 나라는 이를 우리처럼 애처롭게 바라볼 이가 누구인가. 계곡은 또 하나의 일본풍이다. 계곡은 신비가 자생하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그 비밀을 간직한 계곡이 작품에 등장한다. 일본이라는 이야기의 공간적 배경, 하나의 탄생지가 되고자 한다. 바다로 둘러 싸인 나라에 계곡에서 생겨난 이야기들, 가미야 토오루는 공을 많이 들인 이름이다. 그는 죽고 마오리는 살아난다. 하나의 부활 신화다.

히노 마오리 日野真織, 그 이름에서 사랑이 맡아진다. 직 織, 일본어 織る, 나카지마 미유키가 부른 노래는 이렇게 흐른다. 날실은 당신 縦糸はあなた, 씨실은 나 横糸はわたし, 그렇게 지은 것으로 織り成す布は 언젠가 누군가를 따뜻하게 할 거라고 いつか誰かを暖めうるかもしれない.

교통사고로 선행성기억상실증에 걸린 마오리.

날실과 씨실이었던 두 사람이 만났을 때 토오루는 기억하지 못하는 마오리를 위해 옷을 짓기 시작했다. 날실이었던 토오루가 죽고 나서는 씨실이었던 마오리가 그 옷을 대신 짓는다. 누군가를, 토오루의 누나를 토오루를 그리고 나를 따뜻하게 한다. 그렇게 연애는 옷 짓는 일이어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이 일기를 꼭 읽을 것'

'카미야 토오루에 대해 잊지 말 것'


날마다 다른 날이다. 날마다 다른 내가 나를 반긴다. 안녕, 잘 있었어?

가짜가 진짜가 되는 날이 있다면 진짜가 가짜가 되는 날이 있다. 마오리의 마 真는 진짜다. 마오리는 진짜로 천을 짜는 사람이다. 마오리는 그를 그린다. 옆모습, 앞모습, 얼굴, 얼굴, 얼굴, 토오루가 거기 있다.


'세 번째, 서로를 진짜로 좋아하지 않기'

'3つ、お互いを本気で好きにならない。


내 남은 날들은 진짜이기를 바란다.

本気でかくこ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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