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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Mar 04. 2023

기도 130 -1

태곳적 언어

2023, 0304, 토요일


빵도 쪼개고 밥도 먹을 만큼 나눠서 입에 넣어줍니다. 아이는 엄마가 떠주는 숟가락을 꼬물꼬물 받아먹습니다. 엄마에 대한 믿음이 아이의 눈에서 반짝이면 아이에 대한 애정이 엄마 눈에서 꿀처럼 떨어집니다. 밥을 먹여주고 먹으면서 둘은 세상을 번역합니다. 누구나 엄마가 자기였던 때가 있습니다. 엄마가 먹는 것이 내 밥이 되고 엄마가 걷는 양이 내 걸음이 되며, 엄마가 듣고 보고 말하고 느끼는 것으로 감각이 형성되는 내가 있었습니다. 둘의 언어가 우주 공간에 빛처럼 스치고 있습니다. 말하지 않는 발화發話는 원시적이며 초월적이고 아름답습니다. 태아의 언어를 엄마는 알아듣습니다. 뱃속에서 엄마가 보내는 자음과 모음을 가지고 감각을 익히는 모습은 세상에 나와 자기의 언어를 학습해 가는 장면과 닮았습니다. 우리가 나눴던 말 이전의 말을 어디에서 잃었을까요. 그 감각은 어디로 숨었을까요. 온몸으로 느꼈던 것들이 귀와 입으로 알아듣는 말이 되었습니다. 말은 느끼는 것이었는데, 그래서 오해가 없었는데 이제 그런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엄마와 나를 이어줬던 말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우리는 서로를 느낄 수 있을까. 엄마를 알아볼 수 있을까.




먹을 수 있도록 작게, 오물오물 씹을 수 있게 살핍니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능한 젓가락으로만 집습니다. 저에게 필요한 삶의 자세입니다. 크게 삼키면 금방 작은창자 입구에 걸리고 맙니다. 신기하게도 몸이 몸을 보호하려고 시도합니다. 커다란 물 풍선이 어떤 때는 만들어져 그것을 토해냅니다. 아무래도 오늘 묵상은 시간 선택을 잘해서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영어를 어떤 식으로 가르치냐는 질문을 받으면 따로 정해진 것이 없다고 말씀드립니다. 이렇게 조금 해서 공부가 되겠냐는 선생님이나 원장님도 계십니다. 오래 해야 하니까요. 그 말이 제 대답이었습니다. 조금씩 천천히 오래, 그것이 제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시대와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이나 언어는 서로 비슷한 구석이 많습니다. 체하고 어지럽고 질립니다. 정이 떨어지면 아무것도 소용없습니다. 무엇보다 사람이 제각각입니다. 누가 그때 나에게 너는 어떠냐고 물었다면, 그래서 말할 수 있었다면·····. 그런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듣지 못했던 말을 내가 해보는 것이 가르치는 일의 본령本領 같습니다. 모든 말이 천리마는 아닙니다. 천리마를 알아보는 것도 좋은 능력이지만 천리마 아닌 말들도 잘 알아봐야 하는 시대입니다. 천리마가 아닌 말에게 하루 천리를 달리게 하면 어떤 말이든 도망가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고 달리기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말이니까요.




먹을 만큼 나누는 것처럼 배울 것도 나눕니다. 배움도 밥이니까요.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마태오 5:46




언어를 가르치면서, 그것으로 먹고살면서 나는 얼마만큼 언어를 아끼고 있나 생각합니다. 아까운 것을 아까운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고맙게 받아 줄 때 내 양팔에 자잘한 소름이 돋습니다. 말로 하기 어려운 감정이 돋아납니다. 그런 언어, 태곳적 언어를 저는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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