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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Mar 15. 2023

기도 138-1

그런 사람들이 있다

2023, 0315, 수요일



근 1주일 새 눈으로 본 문장 중에 좋았던 두 곳이 있습니다. 언제든 써먹을 것 같아 잘 봐뒀습니다. 특별한 기교나 솜씨가 엿보여서라기보다 따뜻해서 표시해 뒀습니다. 마당 깊은 집에 우연히 들른 듯한 반가움이 있었습니다. 집을 잠시 둘러봐도 되겠냐며 주인에게 허락받고 싶은 운치가 감돌았습니다.




¶ 무슨 음식이든 맛있게 먹을 줄 아는 남자가 좋은 남자라고 했다. 음식을 공경할 줄 모르는 남자는 여자를 골탕 먹인다고. 흰 무나물을 집어 맛있게 오물거리는 남자를 보며 뜻밖의 어머니 생각에 그녀가 웃자, 젓가락으로 꼬치를 집다 말고 남자가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에 반으로 으깨진 흰 밥알이 묻어 있다. 그녀는 무심코 손을 뻗어 그의 입가에서 밥알을 떼어내 준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남자는 멋쩍어져서 젓가락을 든 채로 그녀의 손이 왔다간 곳을 쓱쓱 문지른 다음 보온도시락 속의 흰밥을 한 숟갈 떴다. 어느 순간이다. 밥을 한 숟갈 퍼서 오물거리던 남자의 입에서 아삭하는 소리가 났다. 돌 씹는 소리는 곁이 그녀에게 들릴 정도로 컸다. 씹는 행위를 멈춘 남자와 당황한 그녀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그녀가 삼키지 말고 뱉으라는 말을 막 꺼내려는데 남자는 밥을 꿀꺽 삼키고 있다.


무안한 그녀의 귀밑이 빨개졌다. - 신경숙, 부석사 가운데.




독백 : 나는 남자인데도 쌀 씻는 것을 좋아한다. 이런 말 어폐가 있다. 혼자 살면 세상의 어느 남자라도 자기 먹을 밥은 자기가 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따로 ´나는 남자인데도´ 그렇게 말을 꺼낼 것이 아니라, 나는 쌀 씻는 것을 좋아한다고 그러면 된다.




그러니까, 쌀을 씻으면서 아쉬운 생각이 종종 듭니다. 왜 돌이 없지? 왜 티끌이나 부스러기가 나오지 않지? 바가지에 담은 쌀에 물을 붓고 박박 문지르면서 몇 번을 찬물에 헹구면 사람의 손이며 표정이 쌀과 함께 맑아집니다. 조리를 살살 휘저으면서 쌀을 건져내고 그 쌀에 다시 물을 붓고 불에 가만히 앉히던 할머니, 고모, 외숙모, 어머니, 누나들. 그렇게 먹었던 저녁밥. 우리 아이들은 그런 밥을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쌀을 씻으면서 아무 일도 안 한 것 같고, 이래서는 밥 잘 짓는다는 말도 옛날 말이 되겠다 싶습니다. 밥이 이렇게 쉽게 되면 안 되는데 그러면서 밥을 짓습니다. 전기 코드를 찔러 넣습니다. 돌을 고르는 정성만큼이나 돌을 삼키는 마음, 그런 사람이 그리울 것 같아 이 문장을 건져냈습니다. 밥을 해서 먹고 싶었습니다.




다음은 소설가 구효서의 작품,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공교롭게도 이 소설의 주인공은 ´우영´입니다.




¶ 어쩌면 입속에서 눈처럼 녹아내리던 그 김의 기막힌 맛과 불내를 머금은 들기름 향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맛도 맛이었지만 식구 수에 비해 김의 장수가 터무니없이 적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식구들의 눈치를 두루 살피지 않고는 함부로 김 그릇에 손을 내밀 수 없었다. 누나들과 형이 몇 장째 김을 가져갔는가를 속으로 일일이 계산을 해야 했고, 이때쯤이면 나도 한 번쯤 김을 집어도 염치없는 식구가 되지 않을 거라는 판단이 서야 간신히 손을 뻗을 수 있었다. 모든 김을 혼자 입안에 처넣고 싶다는 욕망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던 것은 막내인 우영뿐만이 아니었다.




아내가 고마운 이유야 셀 수 없이 많지만 김을 사다가 굽고 기름을 바르고 가지런히 잘라 통에 넣어두면 그것을 밥에 얹어 먹으면서 고마워합니다. 바스락거리며 입안에서 녹는 짠맛과 고소한 깨 향과 바다 내음까지 한 묶음의 선물이 사람을 진동시킵니다. 점점 김 맛이 좋아지는 것은 아무래도 사람의 손맛이 깊어지는 까닭일 것입니다. 바쁜 사람이 밥도 잘 챙긴다는 생각도 들고 큰딸이어서 열 살 무렵부터 밥을 했다는데 이제 넌더리도 날 때가 됐다 싶어서 밖에서 사 먹자는 말도 잘 꺼냅니다. 밥을 챙기고 김을 발라주는 일은 사람이 사람을 위하는 일이어서 끝끝내 감동적일 것입니다. 내가 그런 말 한 적 있습니다. 민어 맑은 국이 하도 맛이 좋아서, 언젠가 내가 마지막 식사를 하게 되거든 그때 이 국으로 식사를 하고 싶다고. 잊지 말고 기억해 주라고. 반찬 하나 더 추가해야겠습니다. 그때에도 김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그 정도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싶습니다. 슬픈 것도 없이 잔잔히 말입니다.




아침 6시, 밥을 하겠다고 아내가 방금 일어났습니다. 산이가 고등학교에 가면서 아내는 더 부지런해졌습니다. 더 부지런할 것도 없는 사람이 주방 환풍기를 켜고 서두릅니다. 내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옛날에 엄마도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났겠구나. 누군가 내가 자고 있는 틈에 밥을 짓습니다. 그 사람은 아무래도 나를 많이 사랑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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