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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Mar 16. 2023

139-1

좋은 인연

2023, 0316, 목요일



암체어 armchair는 잘 알다시피 안락의자입니다. 팔걸이가 있고 앉는 자리가 푹신해서 편안하게 기대앉을 수 있는 의자, 누구나 좋아하는 의자입니다. 그런데 암체어에는 우리가 잘 모르는 또 하나의 뜻이 있습니다. 가장 흔하게 쓰이는 표현에는 아마도 armchair traveller라는 말이 있을 것입니다. 한번 상상해 보셨으면 합니다. 어떤 여행자를 그렇게 부를까요. 그리고 그 여행자는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지도 궁금합니다.




그러니까 armchair라는 말이 어떤 말 앞에 있으면 직접 또는 실제로 알거나 행동하는 것이 아닌 간접적으로 알고 책이나 TV를 통해서 경험한다는 뜻을 갖습니다. 직접 경험을 중시하는 사람에게는 세상 편하게 살아가는 듯한 인상을 줄 수 있는 말이기도 하며 또 위험천만한 세상에서 그보다 안전하게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여행도 없다며 적극적으로 지지를 받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결국은 어떻게 그것을 이용하느냐, 그 활용도에 따라 의자의 많은 것들이 결정됩니다. 종교인들이 자주 언급하는 ´쓰임´이 등장하는 대목입니다. ´쓰임´ 꽤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사명´이라고 하면 하나의 사회적 용어가 됩니다. 안락의자는 늘 쓰임을 받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를 묻지, 그것이 어떻게 쓰는지를 따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말하자면 의자의 사명은 누군가로부터 사용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처분에 따라 의자의 가치는 등락합니다. 절대 의자가 사람을 거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주어진 대로 맡겨진 대로 직분을 다할 것입니다. 배신할 줄 모르고 불평할 줄 모르고 진심으로 편안함을 추구하는 안락의자일 뿐입니다. 사람은 조금 다릅니다. 사람은 사용합니다. 사람은 이것도 쓰고 저것도 쓸 줄 압니다. 무엇이든 잘 쓰려고 공부도 합니다. 다재다능하다는 것은 못하는 것이 없이 어떤 것이든 잘 사용할 줄 안다는 말입니다. 며칠 전에 ´갑질´에 대해서 했던 이야기도 여기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사람은 사용하면서 사용당하는 존재입니다. 사람의 쓰임은 복합적입니다. 잘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쓰이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늘 기도하는 것 같습니다. ´좋은 인연´ 만나게 해 달라고 하는 기도를 어디서든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나는 그대의 좋은 인연인가, 땅에 써볼 때가 있습니다.




나무에 대해 많은 것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잠시 예전에 썼던 글을 찾아봐야겠습니다.


1분 30초만 기다려 주셨으면 합니다.




마침 어울릴 만한 그림을 하나 찾았습니다. 2018년 지금처럼 3월 12일에 썼던 풍경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 어떤 나무 좋아하세요?


지금보다 더 젊었을 적에는 나무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우리는 마주치고 지나가면서 모두를 눈으로 봤을 겁니다. 그런데 그 모두가 떠오르는 법은 없습니다. 봐도 못 본 것입니다.


떠오르지 않는 모습은 잊힌 것과는 다르게 본 적이 없는 기억입니다.


젊은 시절에는 왜 나무가 보이지 않았을까요?


아마도 다른 것들로 바빴을 겁니다. 무엇이 그처럼 바빴는지 이제 생각하면 허탈하기도 합니다. 분명히 허투루 보내는 시간은 없도록 애써 노력했을 텐데요.




여기서 다시 시간이 훨씬 더 많이 지난 다음에는 어떨까요?


그때에 오늘을 떠올리면 과연 보일까요?


손에 잡히듯 오늘이 그려질까? 확신이 없습니다. 그것이 조금 쓸쓸합니다.




듣기 좋았던 음악은 무심코 멜로디가 흥얼거려집니다.


맛이 좋았던 음식은 언제나 기억 속에서 다시 데워지고 있습니다.


보기 좋았던 사람은 세월하고는 상관없이 보기 좋게 남아있습니다.




나무.


나는 이제 나무를 보러 다니고 싶습니다.


눈을 감아도 다 보이는 아름드리나무를 하나 갖고 싶어 졌습니다.




담양에 들어서서 금성 산성에 오르면 실타래처럼 가지를 늘려 피어나는 벚나무를 마주치게 됩니다. 희끄무레하게 내리는 우무雨霧 속에서 그 벚나무를 처음 보게 되는 사람은 나이를 잊고 소녀가 되실 겁니다. 어쩐지 구슬픈 가락이라도 들려오는 듯이 발걸음도 차분하게 다가가서 한참을 바라볼 것입니다.




친구가 마음이 많이 힘들었던지 병원에 다닌다는 말을 휴대폰으로 전하던 날에, 무작정 부여로 달려오라고 그랬습니다. 용인에 사는 친구를 부여로 불렀습니다. 나도 부여로 갈 테니 중간에서 만나자. 지금 만나자.


그곳에 가면 ´사랑나무´라는 느티나무 한 그루 만날 수 있습니다.


산 아래 주차하고 둘이 걸어서 올랐습니다. 산 위에 서 있는 나무를 곁에 두고 다른 말없이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공간을 품는다는 말을 이해하실는지요?


진짜 좋은 말은 ´아무 말 없이´입니다.


가쁜 숨이 잦아들고 바람이 수백 년을 다듬어온 느티나무를 보면서 친구와 나는 온화한 기운으로 둘 사이의 공간을 품어냈습니다. 그의 얼굴이 웃었습니다.




지리산 뱀사골에 들어서면 방송에도 여러 번 나왔던 소나무가 있습니다.


영동에 영국사에 가면 은행나무가 있습니다.


산속에서 만나는 자작나무는 마치 소설책 속에 숨겨놓은 편지 같습니다.


시모노세키에서 봤던 배롱나무도 잊지 못하겠습니다.




나는 왜 나무를 보고자 할까요?


나무는 하늘과 땅을 결합하는 나사못 같다.


가스통 바슐라르의 말이 새겨지는 나이가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러브 레터에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몸이 약한 손녀딸하고 할아버지가 겨우내 죽지 않고 잘 견뎌낸 꽃과 나무들을 살피다가 마당에서 주고받는 대사가 있습니다.




"네가 태어났을 때 심어놓은 나무다."


"이 나무에 너하고 똑같은 이름을 붙여주었지."




생명을 생명으로 알고 소중히 다루는 것은 정말이지 기본 基本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나무를 보고 싶어 하는 이유는 살아있는 것들의 자세를 배우고 닮아보고 싶어서입니다.


하늘 끝까지 가지를 뻗치면서도 서로를 헤치지 않고 서 있는 나무에게서 지혜를 얻고 싶은 것입니다.


새들에게 깃을 접고 쉴 수 있는 보금자리를 내어주는 나무의 마음을 내 속에 담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움을 간직하고 살아갈 줄 아는 존재는 가히 나무입니다.


나무 한 그루 심어서.




- 2018년 3월 12일 메모




어떤 날은 내가 기쁜 것인지 나무가 예쁜 것인지 모르게 길을 가다가 나무를 꼭 껴안을 때가 있습니다. 정말이지, 누구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너 때문인지, 나 때문인지. 만약에 만약에 길을 가다가 그런 사람이 있다면 참 당혹스러울 것 같습니다. 아니면 무서워서 도망칠 수도 있습니다. 나무여서, 생각해 보면 나무는 참 좋은 인연입니다.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그만한 인연이 있을까. 나를 숨 쉬게 하다니요. 나를 살게 하니까요. 하이고, 고마운 것이 하늘 같습니다. 내내 어여쁘소서. 오늘은 거기 적어야겠습니다. 손가락으로 간지럽혀야겠습니다. 살살.






내내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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