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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Jun 23. 2023

영화 또는 일기

영화, 다가오는 것들

야구는 1 대 0으로 지고 있다. 이번 시즌은 1점 차 패배가 잦다. 1점 차, 아슬아슬한 곡예, 목요일 밤에 그것을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긴장감 있는 것들은 기운이 좋을 때, 그때 즐겨도 좋으니까.

우연히 라디오에서 들었던 영화 제목이 쉬 사라지지 않고 나를 맴돌았다. 영화나 보자며 아내를 재촉했다. 아이들이 독립하면 홈 시어터는 안 되더라도 영화 보기에 좋은 자리는 하나 갖고 싶어질 것 같다. 프랑스로 가자, 엊그제 주말에는 일본을, 일본 아저씨, 그 도시의 밤거리와 해변, 유치원과 오르막길에서 쏟아지던 햇살을 봤었는데 오늘 밤은 프랑스 어디로 간다. 공원이 너그러웠다. 동경에 있는 공원이 초승달처럼 깔끔했다면 프랑스 영화, '다가오는 것들'에 나오는 공원은 구레나룻이 그대로 자란 중년의 표정을 닮았다. 주인공 나탈리는 자주 풀밭에 눕거나 앉거나 서서 멀리 그리고 가까이 바라본다. 그녀는 철학 교사이면서 철학으로 세상과 접하고 있다. 잊지 않고 철학적이다. 하지만 또 잊지 않고 엄마이면서 딸이면서 아내이면서 할머니 그리고 스승이며 여자, 그 모든 모습들을 인간적이게 다독거린다. 아프지 않게 가끔 울면서 다음 페이지 다음 페이지로, 간다.

슬라보예 지젝을 모르고 중고 서점에서 구입한 책이 몇 년이나 그대로 책꽂이에서 묵었다. 그러면 안 되겠다 싶어서 책을 펼쳤는데 뜻밖에도 거기에 끼어 있는 신문 스크랩 기사, 동티모르가 나오는 아사히 신문. 나는 언제, 왜 이것을 복사해서 여기 끼어뒀을까. 그리고 세월은 어떻게 몽땅 건너뛸 수 있었나. 나를 너무 가볍게 본다, 그대는.

아, 이 사람도 죽었구나. 피아노 소리가 깊어서 죽은 것이 못마땅하다. 조지 윈스턴의 곡을 금요일 오전에 목요일 저녁 일기를 쓰면서 레퀴엠으로 펼쳐든다. 슬픈 줄 모르는 피아노가 슬플 줄 알고 적어 놓은 악보 위를 온몸으로 구른다. 붓이 그림을 그리듯 소리가 춤을 춘다. 레테를 건너는 그대가 외롭지 않기를 나도 손 모아 빌어본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 스쳤다가 영영 모르는 사이로 남을 것을, 딴따따라라, 딴따라라라, 라라. Walking in the air.

철학 교사 나탈리를 구성하는 것들이 잔잔한 호수 같았으며 바람결 같았다. 살아 있었다. 바람이나 호수를 안에 간직하고 산다는 것이 어떤 모습인지 - 나는 '저 배우 옷을 잘 입네'와 같은 투박하지만 정감 있는 말로 대신했다. 아마 10년에 한 번쯤 하게 되는 인사였지 않았나. - 왜 걷고 싶어 질까, 프랑스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는 엉뚱하게도 나를 걷고 싶게 했다. 이번에는 팡세를 들고. 그녀는 모든 등장하는 것들과 거리가 있었으며 그 거리의 대비는 근사했다. 남편을 사랑하지만 구속하지 않았고 자식을 아끼지만 적절했으며 엄마를 돌보면서도 철학에 나오는 문장들을 구사했다. 젊은 제자와도 이야기를 나눌 줄 알고 마리화나마저 나눠 피웠지만 다른 것은 피우지 않았다. 흔들렸지만 잔잔했다고 그녀의 마지막 문장으로 적어 놓고 싶을 정도였다. 경계를 충실히,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중용'이란 그릇에 물을 한 그릇 담아 시원하게 마신 느낌을 건넨다. 나는 이 영화가 좋아질 것이다. 나를 가볍게 대하는 시간이 흐를수록 보란 듯이.

슬라보예 지젝의 책을 또 그만 읽고 잊었었는데 그녀가 언급한 이름 가운데 그가 나왔다. 뜨끔, 몰래 버린 도시락이 그 순간 내 모습이었다. 버린 내가 아니라 버려진 그 도시락, 거기 볼품없던 반찬들 속에 또 하나의 내가 나를 넌지시 바라본다. 어떻게 살려고 그러냐. 부끄러움이 우리가 숨 쉬는 공기였다. 영화가 끝나고 은근슬쩍 빨간 표지의 책을 찾아 놓았다. 모르는 척 살지, 뭐····.

하지만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나탈리는 읊는다. 엄마를 팡세에 나오는 문장으로 떠나보낸다. 내가 누워있을 장례가 오버랩되는 장면들을 사랑한다. 그녀는 철학이다.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는 건 암흑뿐이다. 자연은 내게 회의와 불안의 씨만 제공한다. 신을 나타내는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면 나는 부정으로 마음을 정할 것이다. 도처에 창조주의 표적을 볼 수 있다면 나는 믿음 속에 안식할 것이다.'

영화 중간에 슈베르트 가곡이 흐를 때, 웃었다. 프랑스 온 거 같네, 싶었다. 그런데 영화 제목도 멋지지 않나, L'avenir, Things to come, 다가오는 것들. 프랑스어가 또 당기네, 이런 몹쓸. 거기도 좋은데 끝까지 감독은 마치 여백을 다스리듯 출연진들의 이름을 소개하면서도 엔딩곡으로 Unchained melody를 고른다. 친절하고 예쁜 손끝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다시 감독이 누군가 하고 찾아본다. 미아 한센 러브, Mia Hansen - Love. 때로는 철학적이다는 말이 의도적이라는 말인 줄 알아서 깨달아야 한다. 그녀의 이름은 러브다. 강물처럼, 그것처럼 말이다.

불을 끄고 자러 들어갔다. 산이는 아직 오지 않았고 강이 방에도 곧 불이 꺼졌다. 목요일이었다. 참, 야구는 1 대 0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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