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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Jul 09. 2023

읽다, 讀

그러니까 日記다.


기말시험을 끝낸 아이들 표정이 다양했다. 상대의 표정을 읽는 일, 산다는 것은 그렇게 읽는 일인지도 모른다. 책을 읽으면 진리에 닿고 표정을 읽으면 마음에 닿는다. 마음을 읽으면 흔들리지 않는다. 결국 사람들이 서로 믿지 못하는 것은 읽지 않거나 읽지 못해서다. 그도 아니면 잘못 읽은 탓이다. 오늘은 어떤 페이지를 만나서 어떻게 읽었던가. 인상적이었던가 아무 느낌도 없이 지나쳤던가. 동시에 나는 어떤 식으로 읽히는가. 내 쓰인 그대로 읽히기는 하나. 누가 잘못 읽더라도 나는 거리낌 없이 지낼 수 있는가. 쉬운 일이 없다. 그렇지 않아도 읽지 않고 쓰지 않는 풍토가 날마다 짙어지는데 오역이라고 알아볼 수나 있을까. 제구실을 못하는 삶은 안타깝지 않던가. 밥값은 해야 한다. 잘 읽어야 한다. 그러려면 능력이 생겨야 한다. 없으면 만들어 가면서라도 살아야 한다. 늦더라도 한 줄 한 줄 깨우쳐야 한다. 권수 券數를 헤아리는 일은 맨 나중에나 할 일이니까 지금은 상관 말고 부지런히 읽어가기로 한다. 글을 읽고 얼굴을 읽고 세상을 읽으면서 내 표정을 하나 간직하는 일, 그 표정으로 내가 되는 일이야말로 유일한 목적이다. 하루는 가뭇없이 사라져 가지만 표정 하나를 이루기 위해 수많은 하루가 차곡차곡 퇴적되는 현장이 삶이다. 그 지층 위에 내가 살고 있다. 뿌리를 내리고 잎을 돋우면서 사시사철을 겪는다. 내 가지에 앉았다 가는 새들이 남기는 표정들을 엮는다. 날아가는 것들은 온기가 있어 아직 새근거리고 가느다란 발톱이 기댔던 자리가 부윰하게 동그랗다. 달이 떠오를 것처럼 마음껏 흐뭇해진다. 나무여서 좋은 날이라고 큰 바위를 향해 웃는다. 큰 바위를 닮은 얼굴들은 무엇이 되었을까.

토요일 하루가 저물 무렵 심심했다. 산이도 강이도 친구를 만나서 시간을 보냈고 아내도 친구 집에서 고구마 순을 벗겨 김치까지 담그느라 늦었다. 화장실 두 군데 쓰레기를 치우고 아이들 방에 휴지통을 비우고 오래 방치했던 커튼 봉이라든지 레일 같은 것들도 싹 끄집어냈다. 혼자서 움직이는 공간은 조용하다. 움직이는데도 조용한 것은 적적한 것이다. 평소에 느끼던 것과 뭔가 달랐다. 그저 단조로운 것이 아니라 헐렁했다. 이가 빠진 것처럼 거실이 힘이 없어 보였다. 에어컨 청소를 하느라 오전에 그렇게 요란스러웠던 것도 옛날이야기처럼 감이 멀었다. 식구가 빠져나간 집이란 이런 거지, 대뜸 집이 내게 들이미는 어떤 청구서에는 '단란할 것', 그러니까 알아서 하라는 듯 더 말도 없다. 정지된 채 시곗바늘만 움직이는 세상, 집이었다. TV를 켰지만 저 표정도 저 소리도 아닌 것을 알고 바로 껐다. 무엇인가 읽을 것이 필요하다. 눈이 바라는 일을 돕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다. 밖으로 다시 나왔다. 6시에서 6시 30분까지 엘리베이터를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이나 타고 내렸다. 어디를 갈지 모르는 사람들은 간혹 그런 여행을 한다고 들었다. 백 미터쯤 멀어졌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이제 김치 다 담아서 가는 중인데 혼자서 못 든다고 어디냐고 묻는 아내다. 그때 알았다. 쓸모가 있고 싶은 거라고, 내 쓸모를 읽어주는 이에게 나는 휘청거리는 허리로도 김치통 그쯤은 얼마든 들어 보이겠다고. 천천히 그러나 냉큼 아파트 주차장으로 대령했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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