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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둘레길 12코스 -1

걸으면서,

by 강물처럼


지리산 둘레길 12 코스 - 20231002- 1


바람이 차가워졌다. 17층 북쪽 창으로 보이는 먼 풍경을 딛고 덤벼드는 이 녀석이 사랑스럽다. 네모난 창을 10센티미터 더 열어놓는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귀밑에서 그리고 눈앞에서 흩어진다. 지긋하게 관조할 수 있기를 순간 바란다. 가을 이래서, 가을이 이래서 밉다. 저항할 수 없어서 가만히 눈을 감는다. 아, 바람이 분다.

10월 3일, 식구들이 일어나지 않았다. 강이는 결국 몸살이 났고 감기가 툭툭 건드렸다. 너, 이리 와봐, 어쭈 눈에 힘 빼라! 피곤하면 몸에 나타나는 증상들이 고스란히 강이를 찾아들었다. 강이는 내내 잠을 잤다. 몸살이 난 것이다. 어제 마지막 고개를 내려오면서 강이는 많이 지쳐 보였다. 온몸에 힘이 풀린 모습이었다. 눈꺼풀도 축 내려앉아 더 안 돼 보이던 것을 거들어 주지 않고 외면하듯 앞장서서 길을 재촉했다.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더니 아무 말이 없었다. 날숨만 길게 꼬리를 늘어뜨리며 옆에 앉은 내 귀에 들렸다. 저 숨소리에는 원망이 부쩍 진하게 묻어있구나.

평소 같으면 깨워야 일어나는 산이가 대뜸 일어나서 자기는 아무렇지 않다며 두 발로 탕탕 바닥을 쳐대고 제 가슴을 텅텅 두들긴다. 오늘은 공부를 해야겠다고 너스레도 떤다. 그래도 사내아이여서 잘 걸었나 싶어 마음이 놓였다. 나도 힘들었던 길이다. 산이의 좋은 점은 길에서는 불평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처음 출발하기 전에는 느릿느릿 굴더라도 길이 시작되면 자기 몫을 묵묵히 해낸다.

늦은 아침을 셋이 먹었다. 애들 엄마는 충분히 자고 일어나서 그런지 생각보다 덜 피곤하다며 아침밥을 챙겼다. 이 두 사람은 곧 나란히 자리에 눕게 된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 겉은 괜찮은 것 같아도 사실은 속을 잘 살펴야 한다. 속까지 알아야 진짜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을 우리는 대충 그만그만하게 알고 지낸다. 날이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사는 거지 뭐, 그런 구석이 있다. 나는 그 마음도 쓰다듬고 싶다. 길에서 봤던 두툼한 나무 등걸이 꼭 사람 얼굴 같았다. 저 검버섯이 돋는 얼굴 위로 나무가 자랐을 것이다. 한때는 하늘도 닿을 것 같았을 것이다. 어떤 이는 거기까지만 가고 또 어떤 이는 거기에서 더 들어간 데까지 가준다. 내가 너를 안다는 것도 그 모습일 것이다. 아는 만큼 평화가 있다. 모르는 것도 아는 것이고 아는 것도 모르는 것이겠거니, 그렇게 쓸어내리고 싶은 날들이 세월이 된다.


나는 아직 산에 있었다. 산등성이를 따라 굽이치다가 멀리 소실되어 가던 선이 다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 선을 좇는 내 시선은 물소리를 듣고 있었던가, 땅에 누워서 하늘을 안았던가. 지리산에 들면 풍경이 늘 큰 화면으로 다가오는 것이 신선하다. 가난한 내가 부끄럽지 않아도 되는 텅 빈 공간이 성당 안처럼 성스럽다. 무슨 말이든 선하고 기도가 될 것 같아서 세상을 떠난 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본다. 안방에 누워서 거실에 앉아서 화장실에서도 그리고 거울에도 그 하늘이 선명했다. 하늘이 차린 투명함, 바다 같은 푸른 무대에 우리가 물고기로 헤엄치던 연극은 꿈이었던가. 꿈이 걷는 것인지, 내가 걷는 것인지, 아니면 어제가 걷는 것인지, 두 눈 사이를 열어놓고 깊게 공기를 호흡한다. 둘레길에서 약수처럼 마셨던 달착지근한 숨들이 서늘한 내 이마에서 물방울을 맺는다. 종유석 아래로 미끄러지는 침묵이 적시는 시간, 그 시간을 받아먹고 자라는 석순, 돌에 새순이 돋는다. 무감한 세계에 손님이 든다. 석주 하나가 기울어진 내 등뼈와 혈관을 이어 줄 것이다. 받쳐줄 것이다. 거울을 닦으면서 지난날도 닦는다. 잘 닦았는지 검사를 받는다. 지리산 둘레길 12코스 삼화실에서 대축까지 16.7km를 다녀오고 보름이 더 지났다. 커튼을 내리고 불을 끄면 무대가 밝아진다.

기타를 40년 치고도 여전히 잘 안 된다며 아직도 연습 중이라는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을 듣는다. 바람에 흔들리는 것들과 바람에 떠는 것들이 있다. 잠자리 날개를 달고 날아본다면 아마 알 수 있지 않을까. 내 삶은 바람에 흔들렸는지, 떨었는지. 그래 안다는 것은 이만큼 까마득한 일이다. 울림을 간직한 떨림은 노래다. 현과 현이 진동하며 쌓은 궁전이 알람브라다. 진동을 연주하는 음표는 세상에 없다. 그래서 400년을 더 연주해도 다 이겨내지 못할 것을 안다. 알아도, 아니까 그만그만한 것에 안도한다. 노란 은행잎은 잎맥을 따라 점점 물이 든다. 사람이 곁을 지키고 있어도 어느 순간 잎 하나가 샛노랗다. 사람의 연주가 자연의 한 호흡을 따라가지 못하는 이치다. 나는 잠자리 날개를 동경한다. 그 화선지 같은 날개가 스친 바위가, 바위가 기억하는 잠자리 날개를 잊지 않는다. 거기에 꽃을 그려 넣고 기다린다. 여기가 우주의 끝이다. 오래오래 그리워하기로 한다. 삶에서 마주친 것들에게 보내는 카톡 메시지는 (정중하게) 안녕, 삶은 살아볼 만하다는 사람과 그렇지 않다는 사람들이 함께 있는 모습을 잠자리 날개에 담는다. 그 날개에 물이 들고 빛이 든다. 세상은 보자기 같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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