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구나. 글이 길어지는 만큼 산길도 길었다. 신촌 마을에서 도대체 얼마를 걸어 올랐을까. 날이 좋아서, 길이 힘들어서, 너희가 있어서, 나는 잘 걸었다. 신촌재, 세월이 한 바퀴 돌아 혹시라도 거기에 닿거든 아이들이 아직 철부지였다고, 꿈꾸듯 이 길을 걸었더라고 동화처럼 들려줬으면 한다. 누구라도 좋으니 그 고갯마루에 사는 구절초와 노란 감국 무리는 여전히 보기 좋은지, 그때 그 아저씨는 잘 있더라고 전해줬으면·····.
조화로웠다. 힘이 들어서 길 위에 배낭을 던져놓고 그것을 베고 누웠더니 살 것 같았다. 누구든지 어느 때든지 살 것 같아질 때 꽃망울처럼 저절로 터지는 환희가 있다. 지혜로워야한다. 지혜가 삶을 이끌도록 나는 뒤에서 따라 가야겠다. 다투지 않고 질투하지 않고 악전고투도 사양한다. 조물주가 건네는 물로 목을 적시고 시냇가 풀밭에서 석양빛에 물들었으면, 나를 조화롭게 하소서. 평화로 써 주소서.
너희도 그랬었냐. 구름이 다시 못 볼 구름 같았다. 연기(煙氣) 같이 사라지는 연기(演技)는 구름을 따라올 것이 없다. 그야말로 명연기다. 흰 동작 하나로 보는 이를 쓸쓸하게 몰아세우는 저 충만한 몸짓이라니. 널리 펼쳐서 멀리 흐르는 걸음 하며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두고서도 전혀 움츠러들지 않는 자세가 의연하다. 연(演)은 스며든다. 둘인 듯하면서 하나고 하나인 듯하더니 둘인 모양이다. 잎이 꽃이며 꽃이 잎이어서 같은 순간을 산다. 피고 지는 일도 하나의 공간이다. 순간을 잃고 공간이 허물어지면 사람은 사람의 형태 人를 잃고 말 것이다. 위에서 아래로 긋는 획 하나가 사람을 대신하지는 못할 것이다. 왼쪽에 긋고 오른쪽에 받치고, 둘이서 둘인 듯 그리고 혼자서, 혼자인 듯 완성되는 사람, 그것이 둘이 그리는 '사람'이라는 글자 아닐까. 사람이 사람을 맞이하는 순간과 공간을 자꾸 잃어가면 무엇이 나를 받쳐주어 사람 人이될 수 있을까
미하엘 하네케 감독* 혼자만 이 세계를 염려하고 걱정할까. 프랑스 영화에서 보여주는 가족의 해체와 가정의 몰락은 누구의 탓인가. 누가 끌고 가는 수레바퀴인가. 아내는 일본 영화를 보다가도 아이들이 신산스럽게 살아가는 장면은 부담스러워한다. 아프거나 가난한 가족은 안타깝게 지켜보면서 응원하지만 헝클어지고 혼란스러운 가족을 보면 가슴이 답답해져 싫다고 한다.
정말 그렇다. 스며들고 배어나는 연기가 아니라 공산품 같거나 누구의 패러디 같은 연기, 무엇인가에 자기자신을 잃은 사람들로 가득찬 가족과 사회는 당황스럽다. 자기가 없는 연기는 매케한 냄새로 주위를 어지럽게 한다. 보여줄 것은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위험하고 그로테스크할 뿐이다. 마약이나 술, 도박 같은 뒤틀린 모양으로 재현된 순간과 공간이 거기에 들어붙는다. 연약한 사람들, 풀잎 같고 잎새 같은 사람들이 말라간다.
길에서 나도 연기하고 싶다. 피어오르고 싶다.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고 늘씬한 전나무나 낙엽송도 되면 또 어떨까 싶어 열심히 분장도 해본다. 노래를 부르다 말고 하늘만 보고 살아도 남은 생이 짧다고 바람벽에 적는다. 한탄 위에 경탄, 그 옆에 감탄, 그 뒤에는 평탄하게, 그림 속에 그림을 그린다. 시인도 되었다가 화가도 된다.
- 먹 한 점 쿡 찍는 '동안'은 눈 한번 깜빡, 숨 한번 쉬는 '동안'이요, 눈 한번 깜빡, 숨 한번 쉬는 '동안'이 문득 '작은 옛날(小今)'을 이루니 하나의 '옛날(古)', 하나의 '이제(今)'라는 것은 역시 '눈 한번 깜빡', 큰 '숨 한번 쉬는' '동안'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서도 이 보잘것없는 '동안'에 이름을 내고 공로를 세우겠다고 날뛰고 있으니 그 아니 서글픈 일이랴. - 박지원, 熱河日記, 馹迅隨筆序 가운데
지친 표정이 역력하다. 나 먼저 간다는 말도 없이 서둘렀다. 길이 산으로 가는가 하면 집들이 나오고 집이 나온다 싶으면 산그늘이 졌다. 물소리가 나는가 했더니 느닷없이 오르막이 이어졌다. 안 되겠다. 길에서 벗어나 길 아래 길로 나섰다. 여기로 와라, 거기 우리 넷이 신발 벗고 올라가 앉으면 딱 좋을 쉼터가 있었다. 그래그래그래 여기다. 여기로 와라. 널따랗고 평평한 돌을 찾아 그 위에 메고 온 것들을 꺼냈다. 물을 끓였다. 산이와 강이는 모른다. 오늘 아침에 컵라면 4개를 챙겼다. 김밥집 아주머니에게 따로 돈을 더 주고 밥도 한 주먹 사면서 김치도 얻었다. 이게 어디냐. 나는 이것만 믿고 여태 걸어온 것 같다. 이것을 끓여주고 싶었다. 이왕이면 시원한 물가였으면 했다. 물에 피곤한 발을 담그고 바람에 호호 불어가며 후루룩 먹고 싶었다. 너희들 생각날까. 오래전에 마실길에서 추운 바람 맞으며 먹었던 컵라면, 뜨겁게 가져간 물이 식어버려서 정말 꼬들꼬들하게 씹어 먹었던 컵라면. 나는 그때를 만회했다. 산이하고 강이는 다른 기억으로 걷기 시작했다. 아, 막걸리 한 잔이!
"살 것 같지? 살 것 같아. 맛있지? 맛있어. 정말? 정말.
그런데 이건 언제 챙겼어? 어쩐지 배낭이 불룩하더라니.
라면은 갑자기 먹을 때 진짜 맛이야. 컵라면이라도 이렇게 먹어야 제대로 먹는 거 같잖아. "
길가에서 바람 속에서 김치냄새가 폴폴 나는 2023년 10월 2일 오후 1시.
그나저나 허리는 안 아파요? 배가 부르면 사람은 착해진다. 내 걱정을 하더니 커피 없냐고 그런다. 물론 있지, 암만 여부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흘러간 노래를 듣고 아이들은 유튜브를 보고 그만 가야 할 것 같은 시간에 일어섰다. 얼마나 되겠어? 여기만 넘으면 금방일 것 같은데······. 시간하고 거리, 밖에 나오면 가장 잘 챙겨야 하는 것이 그 두 개다. 하지만 또 내가 가장 허술한 것이 그 둘이다. 해를 보고 가늠하고 목적지가 언제든 변경 가능하기 때문에 거리는 별문제가 안 된다. 물론 숲 속 한가운데에서는 정신을 바짝 차리는 편이다.
해발 458m 고지가 사람을 꽤나 고생시켰다. 고생하러 나와서 편하려고 하는 나를 발견하는 일, 걷기는 부드럽기 그지없는 회초리다. 주변에서는 그나마 높은 고개여서 그런지 갈라지는 길이 여러 개다. 구재봉으로 가는 길, 분지봉으로 가는 길, 우리는 먹점 마을로 내려간다. 야호, 강이하고 엄마가 드디어 내리막이라고 좋아했다. 옆에서 좋아하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동행 아니냐. 나도 털털 힘을 빼고 걸었다. 산이는 꾸준히 마이 웨이다. 힘들다는 말도 심심하다는 말도 아직이냐는 말도 없다. 아이 생각이 궁금했다. 오늘 다 걷고 저녁은 산이가 먹고 싶은 거 먹자. 내 회유는 늘 먹을 것이다. 한참을 올라갔으니까 한참을 내려왔다. 어? 어?
저기는 섬진강 모래톱 아니냐.
*미하엘 하네케 - 오스트리아의 영화감독이자 각본가. 비관적이고 불편한 스타일로 유명하다. 그의 영화는 현대 사회의 실패와 문제점을 자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