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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문우회 남해 문학 기행

某也視善

by 강물처럼



날이 좋다는 말, 그 말을 저울에 올려놓으면 영혼의 무게가 나갈 것 같다. 21g. 사람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함께 몸에서 빠져나간다는 21g으로 가을에는 인사할 것. 일생을 배우면서 보낸 사람도 호의호식했던 사람도 평생 시간에 쫓겨 다닌 사람도 결국 초코바 하나 정도 되는 것을 자기 몫으로 가져가는 것은 아닐까. 오늘 하늘이 무척 좋습니다. 그러면서 떠나는 것은 아닐까.

2023년 10월 28일 토요일, 남해에 다녀왔다. 좋은 줄 모르고 좋았던, 빛나지 않으면서 빛이 났던, 같으면서도 달랐던 가을날 하루였다. 나도 할 일을 찾아 자리에 앉는다. 내가 보낸 하루를 위해 애써줬던 이들에게 말로 하지 못한 인사를, 내 21g을 거기 얹어놓고 적는다. 날이 좋았습니다... ​

어디에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요? 선생님들은 지금 어디가 떠오르시나요.

구례까지 가는 고속도로는 아침 안개가 짙었습니다. 가을은 안개도 세상을 자주 찾는 계절인 듯합니다. 마음이 형식을 따라가는 것인지, 형식이란 것이 마음 따라오는 것인지 오십을 살아온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문우회에 들어온 지 3년, 처음으로 가을 문학 기행에 동참할 수 있었습니다. 으레 그랬듯이 소식만 접하고 아무 반응도 없는 저 같은 회원을 무엇이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늘 한 뼘 떨어져 지내고 있는 저 자신입니다. 뻣뻣한 저를 반가워해주셨습니다. 누이 같은 미소로, 선생님 같은 표정이셨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맞을 거 같습니다. 낯설 것 같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고 편했습니다. 어쩐지 홀가분한 것도 같았습니다. 오랜만에 가는 남해가 마치 친구 찾아가는 날 같았습니다.

먼저 들른 곳이 이순신 장군 기념관이었습니다. 나지막한 산책로를 따라 바다 쪽으로 걸었습니다. 거기 계단 아래에 있던 높다란 입석에 새겨진 말, 전방급 신물언아사(戰方急 愼勿言我死),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 죽음을 말하지 말라. 그 말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다시 오백 년, 천 년이 지나고서도 '그 말'이 하늘을 바라볼 것만 같습니다.

1589년 11월 19일 가을빛이 만연했을 날에 충무공은 순국하셨습니다. 노량 바다는 한가로웠습니다. 큰 별이 바다에 지다, 대성운해(大星隕海) 글자를 지긋이 들여다봅니다. 사람이 별처럼 졌구나. 바다 건너편 관음포가 있는 언덕, 충무공의 시신을 모셨던 이락사(李落祠)에도 가을이 들고 있을 것입니다. 떨어지는 것을 오래 쳐다봤습니다. 글자도 가을에는 허공에서 떨어질 듯하였습니다. 되돌아오던 길에 우리는 멋진 화두 하나를 잡고서 잠시 멈췄습니다. 저는 이희근 선생님에게 어제 대나무며, 족제비싸리, 아카시아와 아까시에 대해 배웠습니다.

"대나무는 꽃 피면 죽어."

길가에 한 숲을 이루고 있던 대나무들이 누렇게 색이 바랬습니다. 죽어가고 있거나 죽은 것들이라고 합니다. 저것이 대나무 꽃이야. 줄기 높은 자리에 가늘게 뻗어 나온 옛날 수수 빗자루 한 줄기 닮은 것이 바로 꽃이었으며 씨라고 합니다. 꽃도 다 마르고 씨만 덩그러니 매달린 모습이었습니다. 어떤 생각들이 지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시를 하나 꼬기작꼬기작 허리춤에 챙기셨던 분, 혹시 계시는지. 저는 저 말을 바꿔봤습니다.

"대나무는 죽을 때 꽃을 피워."

이쪽에서 봤던 것을 저쪽에서 보고 상큼해질 때가 있습니다. 연인도 그렇고 학생도 그렇고 자식도 그렇고 하늘도 그렇습니다. 부부도 그럴 수 있다면 재미날 것 같습니다.

간결하게 쓰고 싶은데 길어지는 것도 아마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어제 평소에 잘 나오지 않던 '애정'이란 말을 서너 번이나 알아봤습니다. 애정이 있으니까 한 번 더 물어보는 거라고 했고, 애정이란 것이 그 길을 다 가게 하는 거 아니겠냐며 끄덕였던 공간도 있었습니다. 임금에게 잊힌 신하는 힘든 노역보다 더 괴로운 것이라는 유배 문학관에서도 어떤 '애정들'을 자꾸 떠올렸습니다. 허균을 잘 알고 싶어 졌습니다. 서포 김만중 앞에서 허균을 기억하는 일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서포는 남해에, 허균은 익산에 유배되었던 글쟁이들이었습니다. 나는 그들의 정치는 모릅니다. 아마 그들의 글을 통하여 알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글이란 것이 사람을 거울보다 투명하게 보여주니까요. 사람들이 못 보는 데까지, 내시경으로 볼 수 없는 곳까지 그것도 무지개처럼 색색으로 보여주는 것이니까요. 허균은 능지처참 당했습니다. 나는 이런 식입니다. 낮은, 불쌍한, 아니면 이름 없는 무리들의 세계가 꽃이 되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꽃이 나면 죽는 것을 알면서도 죽을 때 꽃을 피우는 순간들을 편들고 싶어 합니다. 정확하게 바라보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나이가 들수록 새록새록 돋아납니다. 이번 남해 기행은 그런 나에게 한 줌의 해풍이었습니다.

독일 마을은 스물이 된 청년 같았습니다. 그 아이가 어렸을 적에 그리고 내 아이가 어렸을 때에 만났던 날의 풍경이 아직 선한데 독일 마을은 더 몸집이 커지고 의젓한 기색이 보였습니다. 나는 어릴 적 얼굴을 찾고 싶은 아저씨 같았습니다. 거기 둥그렇게 둘러앉아 잠시 오붓했습니다. 어떤 선생님이 그러셨는데, "이게 좋은 거야, 어디 들어가서 뭐 마셔야만 좋은가,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 얼마나 좋아." 그 목소리가 좋았습니다. 연세가 있으셔서 갈라지고 마른 소리였지만 정답을 일러주는 다정함이 묻어 있었습니다. 어린 후배들이여, 그러는 것 같았습니다.

커피를 마시자는 말도 독일 맥주 한잔하자는 말도 다 싱그러웠습니다. 나는 딸아이에게 줄 선물을 찾았는데 마땅한 것을 고르지 못했습니다. 우리 딸은 지금 그런 나이를 지나는 듯합니다. 특별히 뭐가 좋은지 잘 모르겠는데 뭔가는 필요한 것 같은, 잘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인지 저도 모르겠는, 그런 신비한 시절이 한동안 계속될 것입니다. 강이를 업고 이 도로를 따라 내려갔다가 올라왔었는데 그때 산이는 앞서가다가 저쯤에서 꽈당 넘어지고 울었었는데.... 길거리 하나에도 우리 가족이 있었습니다. 세월은 잘도 간다. 그런 인사가 넋두리처럼 허공에 흩어졌습니다. 너도 나이를 먹어가겠구나. 독일 마을은 또 언제 볼까. 그때가 되면 나는 더 약해질까, 강해질까. 웃음이 번졌습니다.

그나저나 이렇게나 많이 수고하셔서 어쩌면 좋습니까. 저는 5만 원밖에 내지 않았는데 내가 누린 하루는 그 열 배도 더 되는 무게였습니다. 21g 영혼이 내 삶에 바치는 노래같이 아무런 대가 없이 흘러나오는 가락이었습니다. 흥을 돋워주고 길을 알려주고 밥을 챙겨주는 따뜻한 존재 같았습니다. 회장님, 부회장님 그 밖에 다른 임원님들.

해변에만 가면 10년 정도 순식간에 젊어지고 맙니다. 아니, 스물몇 살, 딱 연애하기 좋은 시절로 순간 이동하는 나 자신이 당황스럽습니다. 뛰어들면 안 되는데 뛰어들까 겁이 납니다. 그것도 상주 은모래 해변이라면 난감합니다. 달을 찾아 호수에 뛰어든 이가 옛적에 있었다네요. 경포 호수를 그림처럼 술상에 올려 술을 마시던 이도 있었다네요. 나는 화공도 아니면서 젊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글이 빼어난 것도 아니면서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주인을 반기는 양, 툭 터진 것들을 마냥 좋아합니다. 뚜껑은 까고 문은 열고 마음은 뛰어드는 그런 묘사가 흥겹습니다. 엉뚱한 생각을 했던 날이 있었습니다. 갑자기 빵이 만들고 싶었고 사진이 찍고 싶었습니다. 그 마음이 들더니 학교에 나가고 싶은 마음이 날마다 엷어졌습니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훌쩍 나이만 먹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그때를 즐겁게 기억하는 것은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향해서 마주 섰던 '내가' 단지 조금 기특해 보여서입니다. 실패한 것이지만 나는 아직 여기를 떠나지 않았으니까, 실패도 유보합니다. 아마 그런 기분으로 시를 외웠던 것 같습니다. 아마 그런 기분으로 글을 쓰는 것 같습니다.

어제 커피도 맛있었습니다. 하루가 다 좋았습니다. 왜 그랬을까, 아주 단순한 말이 지금 손가락 끝에서 막 떨어집니다. 좋은 사람들하고 있었잖아.

최환 선생님이 부르셨던 보고 싶은 얼굴, 큰 수술을 받고 하느님 은총을 더 체험하신다는 문광섭 선생님이 부른 시간에 기대어, 꽃이며 나무를 가르쳐 주시는 이희근 선생님의 울고 넘는 고모령, 10월의 어느 멋진 날은 박미경 선생님이, 그리고 다 같이 불렀던 만남은 왜 또 100점이 나와 사람을 웃게 하는지요.

저는 안도현의 시, 가을 엽서를 출발하기 전날 챙겼습니다. 출발 전에 5번, 버스 안에서 5번, 바닷가에서 5번을 읽었는데 차에서 마신 독일 맥주 한잔하고 맞바꿨습니다. 예전 같으면 어떡하든 내가 이것을 외운다고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 어제는 이렇게 보면서 읽어도 괜찮은데요, 그러면서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저절로 되어가는 것이 익어간다는 말하고 짝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잘 익으면 저절로 시인이 될 듯합니다. 어제 나들이는 그런 꿈, 씨앗을 얻어 가는 하루였습니다.


가을 엽서 / 안도현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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