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하루 같아서

某也視善

by 강물처럼



사람과 시, 거기 시 쓰는 모임에는 경계에 있는 사람들이 몇 있다. 탁 치고 물 위로 날아오를 것 같은 어떤 이들. 잔잔하기만 한 수면이 결코 가만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주는 긴장과 기대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아직 시인이 되지 못한 시인들이 있다. 여태 그 사람들에게 갔던 시선을 한 곳을 찾아 거기 오래 두기로 한다. 경계에는 무엇이 피어오르고 있는지, 무엇을 경계라고 이르는지 가만 기다려 보기로 하자.

어중간한 시간 - 추워지면서 해가 일찍 떨어졌다 -이라고 쓰려다가 어중간한 마음이라고 쓰는 편이 옳다는 생각이 든다. 2시 35분에 집을 나서서 3시 5분에 청암산에 도착했다. 쌀쌀하고 구름 끼고 빨리 어두워질 것 같고 동치미를 담그려고 사다 놓은 무며 배추가 김치냉장고에 기대 있고... 청암산에 가야 할 이유는 특별히 없다. 가고 싶은 마음 하나가 오롯이 자세를 잡고 앉아 있을 뿐, 그렇지만 그동안 다닌 정인지 무엇인지 모를 그 힘 때문에 어제도 청암산 둘레길을 걷고 왔다. 늘 하는 말이지만 걷고 10분도 채 못 되어 다른 말을 한다. '그래도 나오면 좋아', '나오길 잘했어'


적응, 익숙함은 뇌가 즐기는 특성이란 말로 2시간 10분 여정을 출발했다. 버릇이란 것이 언뜻 보기에는 낭비도 없이 효율적인데 무엇보다도 버릇, 습관이 들면 가장 좋아하는 것이 우리의 뇌라는 거래. 뇌는 선택과 계획을 하는 곳이지만 근본적으로 그 작업을 즐기지 않는다고 그러네. 뇌가 가장 곤욕스러워하는 것이 어떤 상태인 줄 알아?

밖에 나오니까 다른 이야기가 펄럭거렸다. 뜻밖의 전개, 누구나 흥미로워하는 순간이며 대목 아니겠나. 그래, 뜻밖의 전개야, 뇌는 '갈등상태'를 거부하는 기제야, 갈등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나지만 그 밑바탕에는 '뜻밖이라는' 이탈과 변화라는 낯선 풍경이 깔려 있는 거지. 봐, 새로움이란 것은 새로움으로 다가오기 전에 낯선 것이거든. 그 낯설다는 정도에 따라 새로움도 차이가 나고 어떤 것은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가 되기도 하지. 내 상태가 어떠냐는 그래서 매우 중요한 사실이야. 내가 나에게 익숙한 만큼, 세상에 익숙한 만큼, 그게 무엇이든 그 밖의 것들에게는 이질적인 존재로 다가가는 것이지. 누군가 나를 먹고 토하거나 심하면 아플 수도 있고 어떤 경우는 정신을 잃을 수도 있다면 꽤 위험한 일이야. 회사에서도 학교에서도 작게 보면 가정에서도 얼마든지 적용 가능한 이야기지.


간식으로 구운 고구마 하나를 먹고 나와서 중간 쉼터까지 걸을 수 있었는지, 아니면 하나만 먹어서 흔들렸는지. 그것이 아니라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이지. 뒤에서 따라오던 아내는 내가 위태롭게 걷는다고 걱정이었다. 흔들려도 이렇게 '다른' 말을 꺼내놓으니까 시원했다. 마침 11월 호수에 부는 바람이 넋을 슬슬 건든다. 넋이 빠지면 '하염없이'라는 상태가 몰려온다. 그러고 싶었다. 바람은 역시 악마의 미소가 매력이다. 그래서 나는 겨울 산에 가려나 보다고, 또 다른 이야기로 빠졌다.


말리는 것도 말리지 않는 것도 '경계'에 있어서 아내는 침묵을 선택한다. 방금 그녀는 '갈등', 그녀의 뇌는 꿈틀거렸다. 그러고도 선택하지 않았으니 일종의 훈련을 한 것이다. 단련되어 간다. 아내는 아마 예순쯤 되면 정말이지, 귀가 순해져 어지간한 것은 주름 하나로 해결하며 살지도 모른다.


그리고 중간까지 잘 와서 귤보다 큰 -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서 이러는 중 - 것을 부드럽게 까놓고 자기는 세 쪽, 나머지는 전부 나 먹으라고 줬다. 견과류 두 봉지 중에 하나도 내가 먹고, 저기 오르막을 지나서 의자가 나오는 데에서 또 한 번 쉬니까, 나머지 큰 것 하나와 견과류 한 봉지는 도로 챙겨 넣는다. 자기 먹을 것을 나 주는 것이다. 나는 뱃속에 저장 공간이 없어서 이렇듯 금방 배가 꺼진다. 텅 빈 것이 늦가을 들판 닮았다. 그렇다고 거지 같다는 말은 사양하고 싶다. 나그네는 몸 하나가 좋아야 하는데 '이상한' 나그네가 됐다. 12월 초에, 그때가 마지막일 것 같아. 거기를 놓치면 눈이 내려서 산이 위험한데 그리고 눈이 내리면 덜 쓸쓸하단 말이야. 내가 아내를 설득하고 있는지 잘 몰라서 슬쩍 쳐다봤다.


어디 산에 가려는지 묻는다. 7부? 이렇게 물어오면 대강 윤곽이 보인다. 부안 선생님이 같이 가면 좋은데 아파서 못 가니까 그러네, 그러면서 자기가 입맛을 다신다. 8부 5리까지 이쪽으로 기울었다. 햇살도 몇 이파리 남은 족제비싸리 사이로 간드러진다. 야들야들할 것만 같다. 저것을 한 번만 만져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부자'에 대해서도 한 뼘쯤 되는 거리를 걸으면서 이야기했다. 청암산 둘레길을 걷는 방법은 많다. 여기 올 때마다 지형도를 보면서 길을 공부한다. 그 1분이 달콤하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올라와서 세 갈래 길이 나오고 평소처럼 산책로로 내려오면서부터 '부자'의 개념이 정립될 필요가 있다는, 다소 맥 빠진 주제가 우리 사이에 있었다. 그 거리가 한 뼘이라는 것이다. 지도상에서 볼 때. 한 뼘 동안 나는 아무도 설득시키지 못했다. 나 자신도 요지부동이었다. 이렇게 말을 바꿨다.


예를 들어, 많이 걸을수록 부자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얼마나 잘 걸을까. 그 반대가 그림이 돼야, 그게 이론이야. 걷지 않을수록 가난한 텐데, 가난하다고 해서 신경림처럼 노래하겠냐고.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 가난한 사랑 노래 中


그러니까 시를 잘 쓸수록 부자라고 하면 좋잖아. 시를 못 쓴다고 슬프거나 아프거나 외롭거나 쓸쓸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돈은 막 하잖아. 사람이 못 쫓아가니까 문제라는 거지. 못 쫓아가게 만들어 놓고 비난하면 사람이 어떻게 사냐고.


어두워지기 전에, 그것이 목표였는데 어두워지기 전에 길이 다 팔렸다. 재료가 다 떨어졌다. 나도 어지러웠고 물도 집게손가락 한 마디 남았고 배도 고팠다. 저녁 먹으러 산이는 6시 반에 집에 오라고 그랬다며, 물국수를 먹을 건지, 비빔국수를 먹을 것인지 또 묻는다. 밖에 나오기 전에 벌써 저녁에 비빔국수 해 먹자고 그랬으면서, 11월 속을 걷다 보니 따끈한 국물이 생각났던가 보다. 막걸리 한 잔이 호수처럼 출렁거려서 비빔으로 골랐다. 아, 뇌가 꿀렁. 하루가 하루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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