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린 Feb 08. 2021

사랑은 어떻게 시작하는가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랑이 있나요?’라고 묻는다면, 단 번에 떠오르는 몇몇 장면이 있다. 반짝 빛나는 순간도 더러 있고, 길을 헤매는 듯 어두운 순간도 있었다. 모든 시간은 끝을 알 수 없이 펼쳐진 세상인 듯했지만 지나고 보니 겨우 한 줌 되는 시간에 불과했다. 그리곤 그 속에 담긴 희열과 설렘, 고통과 눈물로 얼룩진 추억들은 꽤나 근사한 기억이 되곤 했다. 찰나의 장면들은 어떤 의미에서건 삶을 뒤흔든 사건들과 깊이 맞물려 있었고, 한 번씩 휘몰아치듯 온몸을 감쌌다.


지난밤 술과 분위기에 한껏 취해 잠든 그들은 느지막이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역시 취하기 전에 만들어 놓기를 잘했어, 단! 맛은 보장 못 해."


장난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하던 그는 냉장고에서 아보카도 샌드위치와 맥주를 챙겼다. 지난밤 서툰 솜씨로 주방에서 요리를 하던 그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 웃음이 터졌다. 칼 한번 잡아보지 않았던 그의 투박한 손에는 미로 같은 마트를 뚫고 쟁취해온 온갖 식재료가 가득했다. 낯선 이의 손에 들린 위태로운 칼자루가 도마 위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름답게 춤을 춘다. 위대한 사랑의 어리석음은 인간의 두려움을 앗아가고 용기를 선물한다. 


그녀는 주방에서 우왕좌왕하는 그를 보며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보는 심정이었지만 이번만큼 그저 곁에서 머물며 애정 어린 시선으로 지켜보기로 해본다.



'덜컹, 덜컹-' 비포장도로를 한참이고 달렸다. 설렘으로 가득한 버스에서 이제 막 불꽃 튀는 사랑을 시작한 그들에게 비포장도로 따위는 아무런 해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부딪치는 어깨에서 묘한 전율이 일었다. 세상이 아름다워 보인다는 그 식상한 문장이 가장 잘 어울리는 그런 날. 


그녀는 자신의 옆에 앉아 세상모르게 졸고 있는 그가 새삼 얄미우면서도 그게 무슨 상관이랴, 그마저도 사랑 

사랑스러워 보였다면 이는 사랑에 빠진 한 여인의 오류라고 해두자. 


애초에 불같은 사랑의 존재를 부정했지만, 인간은 가끔 무모함의 길로 들어선다. 미지의 세계에서 만난 미지의 사람에 대한 궁금증과 열정은 전에 없던 강렬함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충만함은 사랑의 충만함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내면이 연약해져 있는 시기의 사랑보다 충만함으로 가득 차 있을 때의 사랑을 더 선호했다. 설령 두 형태의 사랑의 끝이 같더라도 흐르는 시간 속에 새겨지는 기억의 의미는 확실히 달랐다. 이 순간 그들의 목적지는 오로지 서로에게 향해있을 뿐이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 소리가 손가락 끝까지 전해졌다. 무모함에 다시 한번 패를 걸어 본다. 물론 우린 자신의 패를 열어 볼 수 없다. 사랑이란, 자신이 선택한 패에 모든 것을 바치는 것. 그것이 전부이다. 그렇게 사랑은 시작된다.


이것이야말로 사랑을 통해 발견되는 인간의 위대함이자 나약함이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