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린 Sep 24. 2019

공식이 깨지는 순간


햇살이 유난히 뜨겁다. 기분 좋은 따스함. 아침부터 그녀는 설레는 마음으로 몇 없는 화장품을 꺼내 들고 오랜만에 거울 앞에 앉아 꽃단장을 했다.  오랜 여행으로 햇살에 그을린 구릿빛 피부와 양 볼에 살짝 올라온 주근깨를 오늘만큼은 살짝 숨겨 보기로 했다. 낡고 낡은 옷들 중에 가장 예뻐 보이는 옷을 꺼내 입었다. 평온한 일상이 생생히 살아 움직였다. 오늘만큼은 긴장되는 마음을 다독이며 햇살의 여유로움을 만끽해 보기로 했다. 그 날은 며칠 전부터 기다리던 예술가들의 플리마켓 축제가 열리는 날이었다. 호스텔은 아침부터 들뜬 마음으로 축제를 준비하는 여행객들로 붐볐다.


그녀 역시 그런 분위기에 취해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불현듯 서툴고 어색하게 “축제 같이 갈래요?”하고 말을 건네던 그의 수줍은 얼굴이 생각났다. 그 후로  그녀는 이 도시가 몹시 궁금해졌다. 사실, 그의 삶이 궁금해졌다는 게 맞을 것이다. 한국의 생활을 정리하고 무작정 떠나왔다는 지구 반대편의 나라 아르헨티나. 흔히 선택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곳에 왔냐라고 물었을 때 그는 자신의 삶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다고 느꼈던 순간에 선택한 곳이라고 했다. 그런 말을 하는 그의 표정에서는 왠지 모를 결연과 꿋꿋함, 그리고 약간의 그리움과 서글픔이 묻어나는 듯했다. 말하나 통하지 않는 외로운 타지에서 다행히 좋은 사람들을 만나 일 년이 넘게 지내오고 있다는 그는, 이제는 이곳이 자신의 고향처럼 편하다고 했다. 그래도 늘 이방인으로서의 외로움과 초심을 잊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쓴다고 말했다.




저 멀리서 어색한 미소와 함께 머리를 매만지며 걸어오는 그가 보였다.


“오래 기다렸어요?

“아니요. 저도 방금 왔어요.”

“그럼 갈까요?”


약간의 두근거림이 느껴지는 긴장감을 안고 거리를 걸었다. 지루하지 않은 대화, 눌러왔던 질문들, 삼십 분이 채 안 되는 그 시간이 억겁의 시간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마음의 깊어짐이 생기기에 충분한 듯 부족한 시간. 이 순간이 조금 더 길었으면 했다.


멀리서 잔잔한 재즈 연주 소리가 들려왔다. 따스한 바람과 푸른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는 반짝거리는 햇살이 너무나도 조화로운 그런 날이었다.


예술가들이 축제답게 거리에는 여행객, 예술가들, 동네 주민들 한대 모여 너 나할 것 없이 음악과 분위기에 취했다. 차분하고도 감성적인, 하지만 생기가 넘치는 분위기는 단숨에 그녀를 거리 안으로 이끌었다. 그녀는 다른 세상에 초대된 듯 쉬지 않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시선을 사로잡은 그림 앞에 한참을 멈춰 감상하기도 하고, 정성 가득 담긴 핸드 메이드 액세서리들을 보면서 이리저리 팔목이며 머리에 가져다 대기 바빴다. 그녀는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여행 중의 안정감이었다. 먼 타지에서 오랜 시간 여자 혼자 여행을 한다는 건 꽤나 큰 긴장감을 안고 지내야 하는 일이라 언제부터인가 어딘가를 가고 무언가를 볼 때면 마음에 경계태세를 먼저 취하곤 했다. 오늘은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에메랄드빛 하늘이 너무나도 빛났고, 수채화 물감으로 그려놓은 듯한 도시는 원래 늘 그 자리에 있던 것처럼 그녀를 금세 한 폭의 그림으로 물들여놓았다.




그는 한 발짝 뒤에 떨어져 걸으며 생동감 넘치는 그녀의 모습을 한참이고 바라봤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의 차갑던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인 모습이 놀랍기도 하고, 시시각각 바뀌는 다채로운 표정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순간순간 무장해제되는 그녀의 모습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우와! 우리 저기도 가봐요’ 하며 거침없이 자신의 손목을 낚아채고는 사람들 무리를 뚫고 앞서가는 그녀에게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이끌려 갈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그에게는 무엇을 보고 듣던 중요하지 않았다. 낭만이 넘치는 이 거리에서 그녀 옆에 서서 함께 음악을 듣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히 완벽한 순간이었다. 아이처럼 해맑은 미소는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어주는 듯했다. 그녀가 자신을 이끌고 도착한 곳은 자신이 평소였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경쾌한 재즈 연주가 한창인 버스킹 장소 앞이었다.


“예쁘다..”


그는 자신의 시선 끝에 다다른 그녀를 보고 자기 모르게 입 밖으로 흘러나온 말에 흠칫 놀랐다. 혹여나 듣지는 않았을까 하며 애써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도 그녀는 여느 여행자들과 어울리며 음악에 몸을 맡긴 채 춤을 추기에 바빴다.


연주가 고조되면서 거리는 사람들로 더 북적였다. 인파에 섞여 이리저리 부딪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와 그녀의 거리 역시 한껏 가까워졌다. 어깨가 가까워질수록 그의 심장 박동수도 빨라졌다. 쿵쿵. 묵직한 콘트라베이스 소리에 맞춰 주체할 수 없는 설렘과 두근거림이 온몸으로 퍼져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어 살짝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녀는 순간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놀란 듯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이내 세상에서 더없이 환하고 밝은 미소로 웃어 보였다. 그녀의 웃음에 괜히 멋쩍어진 그는 당황한 듯 서둘러 손을 내리며 말했다.


“아.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괜찮아요. 뭘 이런 걸로 그렇게 쑥스러워하고 그래요.”

“......”

“난 좋은데.”

“네..?”


그는 그녀의 말에 당황한 듯 되물었다. 그녀는 확인이라도 하듯 입모양으로 “괜. 찮. 다. 구. 요.”하며 속삭이듯 다시 말했다. 그리곤 그의 팔을 잡아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렸다. 그건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거침없는 그녀의 스킨십에 그는 숨도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어정쩡한 모양새로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순간 자신의 모습이 너무 바보같이 느껴진 그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그녀의 어깨 위에 올려진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지난 며칠 그녀와 함께 한 시간들은 아주 낯설고도 묘한 감정을 선사했다. 자신이 이렇게나 서툰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그녀와 함께 있을 때면 머릿속은 백지장이 되는 듯했고, 모든 신경 세포들은 제 멋대로 움직였다.




그녀는 하루 종일 모든 감각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같았다. 눈 앞의 펼쳐진 풍경부터 시작해서 귀를 자극하는 음악까지. 그중에서도 가장 그녀를 신경 쓰이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지금 자신의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이 남자였다. 축제의 분위기에 취해 거리를 걷다가도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느껴질 때면 모른 채 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그에게까지 다 들릴 것만 같았다. 결국 사람이 많은 버스킹 장소 앞에서 도착해서야 조금은 진정되는듯했다. 지금 이 두근거림은 저 연주 소리에 반응하는 거라는 자기 합리화와 함께.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진 그의 손을 살짝 잡았다. 따뜻한 온기, 포근한 품. 좋다는 감정 이상의 무언가가 심장 저 깊은 곳에서부터 느껴졌다.


그 날은 유난히 해가 길었지만 하루는 짧았다. 신데렐라가 된 것 마냥 흘러가는 초침 시계가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이대로 흘려보내기에는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도 한정적이었고, 그 시간에 비해 마음은 점점 커져갔다. 늦은 저녁까지 그들은 함께 했다. 네온사인 조명과 시원한 바람이 부는 루프탑 바에서 서로의 시선과 온기를 느끼며 무수히도 많은 대화를 나눴다. 적당한 농담과, 애정표현을 곁들인, 이제 막 시작한 연인들의 대화였다.


그가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한참을 그녀의 눈동자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거 알아요?”

“뭐요....?”

“얘기할 때 상대방 눈 엄청 잘 쳐다보는 거.. 그래서 처음에 조금 당황했어요. 내 감정을 다 들키는 것 같아서... 근데 지금 보니까 눈이 참 예쁘네요.”

“저는 눈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이 더 잘 느껴지기도 하고 저도 솔직해질 수 있어서 좋아요. 그래서 그런가 봐요.”


사랑에 여러 번의 아픔을 겪었던 그녀가 선택했던 방법은 도망치는 게 아니라 정면 돌파하는 거였다. 누군가를 품고 사랑하는 감정을 참아내고 확인하고, 그런 감정의 덩어리들을 보기 좋은 것들로만 조각하고 세공한 후에 상대방에서 보여주면 늘 후회가 더 크게 남았다. 네가 한 번 밀어냈으니 나는 두 번을 밀어내야 하고, 네가 두 번 당겼으면 나는 한 번만 당겨야지 하는 계산적인 관계는 이제 피곤하게만 느껴졌다. ‘여자는 여우짓도 좀 하고 밀당도 좀 해야 남자가 좋아하지. 안 그러면 질려.’하는 말도 안 되는 주변 사람들의 말들이 지겨웠다. 왜 마음의 크기는 매번 이런 방식으로 결정되어야 하고, 그 크기가 맞지 않을 때 사람들은 권태로워할까. 왜 나의 감정을 타인에게 보이기 전에 타인의 반응을 살피고 내가 원하는 반응이 오기를 안절부절 애태우고 기다려야 하는 걸까. 이런 질문들은 더 이상 그녀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사랑에 있어서 왜 누가 더 많이 숨기고 누가 더 많이 표현하느냐에 따라
이기고 진다는 말도 안 되는 공식이 적용되어야 하는 건지,
그 공식을 깨보겠노라 다짐을 했던 그녀였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인가 그녀는 매 순간에 감정 표현을 굳이 숨길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했다. 충분히 느끼고 충분히 표현하고 모든 것을 완벽하게 드러내고 싶어 했다. 단, 그 안에는 좋음만 존재한 건 아니었다. 늘 누군가에게 맞춰주기만 했던 자신의 감정에 좋고 싫음이 불분명해졌음을 그녀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자신을 보호하고, 치유하는 방법이었다. 무너졌던 자신의 세상을 온전히 세워가는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언젠간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받아줄 수 있는 세상이 나타나길 기다리면서.




그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매번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지난 연인들은 상처를 받았다고 하면서 되려 자신에게 상처를 주며 떠났고, 그런 패턴의 연애에 지쳐있었다. 자신이 영원을 맹세해도 그런 맹세 따위는 혼자일 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공기 중에 흩어지는 낱말들에 불과했다. 이별과 만남의 반복 속에서 어느 순간부터 '마음에 영원한 건 없다'라고 비관적으로 말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는 순간 한없이 서글프다고 느꼈던 그였다. 그럴 때면 '이제 나는 더 이상 온전히 사랑을 할 수 없는 것일까?'라는 절망도 함께 따라왔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잃는다는 것에 불안을 느끼고 불필요한 감정들을 소모해야 하는 관계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했다. 도망치는일은 더이상하고싶지 않았다.


자신이 주는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줄 사람이 그리웠다. 의심하고 검열하는 그런 관계 말고, 조금은 순수하고 바보 같다고 말하는 그런 관계를 꿈꿨다. 주변에서는 이제 그런 사람은 없다고, 순수함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라고 핀잔을 주는 사람들로 수두룩했다. 자신의 나이에 맞지 않는 현실성 떨어지는 연애를 꿈꾸지 말라고 했다. 그런 기준은 도대체 누가 정해놓은 건지 궁금했다.


그런 그에게 그녀가 나타났다. 꾸밈없고, 지나치게 솔직해서 때때로 자신을 당황하게 만드는, 왠지 자신의 일생을 흔들 것만 같은 그녀가 나타났다. 주는 사랑에 주저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그녀, 밝음 속에서도 단단함이 느껴지던, 그래서 더 안아주고 싶은 그런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웃고 있었다.


사랑은 아주 찰나의 순간이다.
어떤 단어로 설명하기 힘든 온갖 감정들이
한대 뒤섞여 소용돌이치는 과정이다.
그래서 인간은 지난 흉터 위에
새로운 살이 돋아나기가 무섭게 사랑을 한다.



모든 연인들이 그렇듯, 그들은 단 한순간도 이별을 예상하고 시작하지 않았다. 인간은 사랑 그 후에 오는 모든 감정들에 대해서 때로는 무책임하리만치 무모하고 도전적이다. 마음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강렬함을 무기로 서로에게 아주 빠른 속도로 빠져들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시련들에 대해서는 타협하거나, 미뤄두거나, 혹은 미리 짐작하지 않는 것이 그들이 지금의 세상에서 온전히 사랑으로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마음을 가볍게 여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었다. 마음에 가벼움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처절하게 느낀 순간 그녀 스스로가 가벼워지기로 선택했다. 마음을 저 내면 깊숙한 곳에 숨겨놓되, 감정에는 솔직하기로 선택했다. 그것이 그녀가 가벼워질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이 두 가지를 분리시키는 일은 그녀에게 지난 상처들을 헤집는 일이었지만, 한 번 겪어내고 나니, 한결 수월해졌다고 느꼈다. 상처를 덧나게 하지 않기 위한 일종의 방어기제이기도 했다.


그는, 그녀는 다를 것이라고 믿어보고 싶어 졌다. 그 믿음은 인간의 욕망과 나약함이 가장 크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믿음과 동시에 생겨나는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었지만, 기대로 인한 실망이 두려워 주저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믿고 싶은 마음에는 이유가 없었다. 때로는 아무가 없는 것이 가장 큰 이유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가슴이 뛰는 곳으로 항하는 것이 지금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치유의 길이었다.




존재의 유무로 효용가치를 판단하기에 사랑은 너무 광범위하다. 위태롭고 달콤하고 때론 처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을 하고, 사랑을 하고 또다시 사랑을 한다. 실존하지 않은 사랑이란 감정으로 너무나도 많은 위험부담을 감수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로맨스를 꿈꾸는 이유는, 저 내면 깊숙이 사랑받고자 하는 본능적 욕구로 인한 것이다. 스스로가 충분히 가치 있는 존재임을 확인받고자하는 욕망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녀가 물었다.

"너무 행복해서 무서워. 지금의 감정에 기시감이 느껴져서 더 무서운 거 뭔지 알아..? 우리가 나중에 만났더라도 이렇게까지 사랑을 했을까?"


그는 확신에 차있는 말투로 말했다.

"그랬을 거야."


어두운 밤하늘 아래,
전구 하나가 스파크를 일으키며 빛을 내기 시작했다.
불완전한 마음과 마음 사이로 빛이 뛰어들어왔다.
 빛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이미 그들은 서로에게 빛이 되었다.



모든 일상을 서로의 온기로 물들이는 것. 

지금 그녀는, 지금 그는. 그렇게 넘치는 마음으로 사랑을 하고 있었다.



이전 04화 너를 마음에 담을 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