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몸은 참으로 솔직하다는 생각을 한다. 단련하는 만큼 강해지지만 사용하는 만큼 닳는다. 나이가 들수록 육체의 한계를 느끼는 것은 인간의 유한함을 상징한다.
퇴근길. 엘리베이터가 오기만을 기다리다 몸을 틀어 비상구 계단으로 향했다. 아파트 13층. 끼익- 비상구 문을 열었다. 오늘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엘리베이터보다 계단을 이용하고 싶었다. 고요한 비상구 계단 창문 너머로 보이는 달빛이 유난히 밝다. 한걸음 한걸음 계단을 올랐다. 1층 2층..3층...4층....5층...... 빨리 올라오라고 재촉이라도 하듯 발소리에 맞춰 전등이 하나둘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 한다.
숨이 점점 가빠온다.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봤다. 꽤나 많이 올라왔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겨우 6층. 버튼 한 번이면 찰나의 순간일 높이가 이렇게나 아득하게 느껴진다니. 겨우 이 정도로 숨이 차는 육체가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언제 이렇게 체력이 떨어졌나 싶었다. 구차하게 '옛날엔 내가...-!' 라며 속으로 생각했다. 크게 한 번 숨을 고르고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눈앞의 계단이 마치 꽉 막힌 일상을 대변하는 듯했다.
어쩌면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은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일상의 사소함 속에서 느끼면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끄떡없을 것 같았던 나의 젊음은 시간의 흐름에 맞춰 함께 흘러가는 중이다. 여전히 나는 '젊음'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나이이지만 하루가 다르게 물리적 유한함을 불안과 조급함이라는 이름으로 체감한다. 그 덕에 요즘은 아주 작은 활동에도 쉽게 피로감을 느낀다. 이것은 마음과 육체의 묘한 합작이다.
지난밤 계단에서 마주한 체력은 곧바로 운동을 등록하게 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1년 반 동안 게으름을 단 하루 만에 청산하게하는 계기였다고나 할까. 혼자서도 충분히 홈트레이닝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과거의 다짐이 무용지물이 되는 순간이었다. 체력이 많이 약해졌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느껴오고 있었다. 가령, 늦은 시간까지 모임을 하고 집에 들어가면 다음날 어김없이 후유증이 남는다거나, 몸이 마음을 따라오지 못해 계획했던 일들을 완수하지 못한다거나, 피곤하다는 말을 하는 횟수가 늘었다거나, 아침마다 챙겨 먹는 약이 들어다거나 하는 것들. 이 전에는 없던 삶의 패턴들이 생겨났고, 반 강제로 일과 놀이 사이의 조율이 늘어났다. 조금은 무력하고 따분한 일상으로 발을 디뎠다고 해야 할까. 날이 갈수록 온갖 이유를 갖다 붙인 핑계들을 계속해서 만들었다.
돌이켜보니 언제부터인가 창작 활동에 무료함을 느낀 건 그만한 것들을 내 안에서 만들어낼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미뤄둔 일들이 넘쳐났다. 삶이 나에게 주는 넘치는 영감들을 풍성하게 느끼고 사유하는 데는 생각보다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정신과 체력의 단단함을 요구한다. 흘러넘치는 생의 아름다움들은 보기보다 많은것들은 품고 있는터라 꼭꼭 씹어먹어야 체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억지로 집어 삼키기를 반복하다 탈이났다. 결국 아무것도 먹지 않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체력은 좋아하는 일을 오래도록 하기 위한 베이스다. 왜냐하면 모든 창작활동은 결국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할 테니까. 근력과 예술성의 상관관계. 사뭇 접점이 없어보이는 이 둘은 아주 진득하니 연결되어있다.
얼마 전 할아버지가 건강검진을 받고 15년이나 젊게 나왔다며 자랑을 하셨다. 두시간이 넘게 등산을 하시며 좋아하는 꽃과 나무를 들여다보다 보는일. 그것이 할아버지의 낙이다. 그는 지칠줄 모른다. '나는 과연 80이 넘어서도 저렇게 지치지 않고 걸어 다닐 수 있을까?' 지금의 상태라면 불가능할 것처럼 느껴졌다. 오래도록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은데, 왜인지 그러지 못할 것 같은 불안이 엄습했다.
이른 저녁 집이 아닌 헬스장으로 향했다. 잠들어 있던 몸을 깨우며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과 가파오는 숨을 느껴본다. '한번만 더-!!'마지막 힘을 쮜어짜내어 팔을 들어 올린다. 요가 매트 위에 쓰러지듯 몸을 누이고는 거친 숨을 내쉬며 호흡을 가다듬는다.
역시 사람의 몸은 참 솔직하다. 그래서 나는 요즘 운동을 한다. 쓰는 만큼 닳기에, 쓰는 만큼 채워지는데 시간을 쓴다. 더 많은 것들을, 내가 좋아하는 일은 오래도록 그리고 꾸준히, 나의 마음의 크기만큼 해낼 수 있도록 나의 체력을 키우는 일에 집중한다.
마음은 쉽게 몸을 따라가고, 몸도 쉽게 마음을 따라간다. 문을 열고 저 멀리 보이는 침대 위까지 가는 길이 아득해 보이지 않도록, 한 걸음씩 내딛는 걸음의 무게가 가벼워지도록. 나는 나의 삶을 살려내기 위해 운동을 한다. 보기 좋음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무너지지 않기위함이다. 나의 일상을 깨우고, 가라앉은 마음을 일으키기 위해 의식적으로 움직인다. 어쩌면 이것은 새로운 창작을 위한 도움닫기일지도 모른다.
오늘의 저녁은 평소와는 다른 의미의 피로감과 함께 침대로 향한다. 약간의 근육통과, 약간의 뿌듯함과, 약간의 설렘을 품은채 깊은 밤으로 걸어 들어간다.
내가 앞으로 살아내어야 할 시간들이 조금은 느리게 흘러 가도록, 삐걱거리는 마음과 몸에 기름칠을 한다.
나는 멋진 어른이 되고싶다. 어쩌면 멋진 어른이라함은 영원하지 않음을 인정하되 영원할 것 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육체와 영혼의 젊음을 함께 키워가는것. 끊임없이 가꾸고, 조금은 의식적으로 깨어있으려하는것.
삶이란 그런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