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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린 Jan 28. 2022

낭만적 삶에 대해 묻는다면

낭만이 현실과 거리가 멀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다.


언제였던가. 낭만적인 사랑을 꿈꾼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니던 때가 있었다. 아직도 그 마음이 유효하기는 하나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정확히는 억지로 붙잡고 있는 것에 가깝다.


낭만이니 운명이니 하는 것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내가 아는 사람들 대부분은 어느 시절엔 그런 단어들을 사랑했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우리가 조금씩 다르더라도 마음 한 켠에는 낭만적인 사랑에 대한 일말의 기대감을 품고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 속에서 낭만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이따금 낭만적이라고 부르는 순간들을 보면 지극히 찰나의 순간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잠깐이라도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가득 담아 아주 잠깐 사랑에 빠지는 셈이다.


어떻게 하면 낭만적으로 살 수 있을까. 이 질문에 우리는 무엇이라 답해야 할까. 어떠한 상황과 공간 속에 던져져야만 낭만을 느낄 수 있는 걸까. 


낭만적 분위기를 쫓아 계속해서 달린다. 그렇게라도 낭만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싶은거다. 팍팍한 삶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다.  무드등을 켜고, 음악을 켜고, 괜히 한 번 아쉬운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눈 앞의 바다니 평화롭고 고요한 풍경이니 하는 것들을 나열해본다. 약간의 감탄사와 함께 그 안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설렘을 향유한다. 


이상하다. 낭만의 프레임이 어쩐지 몹시 이질적이고 틀에 박혀있다. 


낭만이 현실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 정말일까. 현실로부터 도망쳐 나오면 낭만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걸까. 몸이 부서져질듯 돈을 버느라 낭만을 향유할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 우리의 현실은 낭만과 거리가 멀다고 말한다. 그렇게 낭만을 원한다면 현실을 포기하면 되는 게 아닐까. 근데 그럼 우린 정말 낭만적인 삶을 살까?


딜레마에 빠졌다. 내가 꿈꾸는 낭만은 멋들어진 바다가 있는 곳에서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는 것인데, 누가 그것을 낭만이라 정의 내렸을까. 사실 그 속에서도 우린 여전히 치열하고 고되게 살아가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쫒는 한 낭만을 삶에 가져올 수는 없다. 낭만은 무언가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심 없음에서부터 시작하는 걸지도 모른다. 타인의 궤적을 따라 낭만을 쫓아가다 보면 그것이 낭만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지니까.  우리가 그리는 낭만은 단편에 불과하다. 어쩌면 낭만은 지극히 상대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오래전 낭만주의 시대라 불리우던 18세기. 개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답답하고 엄격한 규칙을 중시하던 그 시절, 그것에 반발하여 개인 나름의 감수성과 저마다 다른  삶의 역동성을 찾아 표현한게 낭만주의였고 그것이 로맨스였다. 그들에겐 삶 자체였다. 지극이 일상적이다. 환상이나 환영일 수 없다. 낭만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뼈아픈 현실이다. 이상과 현실이 동떨어져있건 말건 결국 내가 이뤄내어야 하는 세계다. 


낭만적인 삶이 무엇이냐고 한다면, 나는 그저 가짜로 향유하는 낭만보다 진짜로 향유하는 낭만이 넘치는 삶이라고 하고싶다. 우리 삶에서 익숙하거나 뻔한 것들, 그 낡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그렇게 비현실적인 세계와 현실적인 세계의 충돌 사이에서 우연히 만들어지는 또 다른 세계의 낭만을 즐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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