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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린 Jan 27. 2022

내가 사랑했던 세계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던 시절엔  곧 잘 사랑에 빠졌던 것 같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사랑했던 것은 혼을 쏙 빼놓을 만큼의 강렬함이었는데, 그것은 마치 홀로 낯선 땅에 발을 내디뎠을 때 느껴지는 감정과 비슷했다.


십 년 전쯤 처음으로 혼자 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적이 있다. 목적 없이 떠났고 겁 없이 길을 물었다. 무서울 것 없던 나는 무모하리만치 용감했다. 사랑으로 충만한 상태에선 때때로 시야가 흐릿해지기 마련이니까. 내가 사랑한 강렬함은 그 시절의 나를 대변하곤 했다. 비행기 창문으로 비치는 나의 모습은 설렘으로 가득했고, 그것은 지금은 다시 되찾을 수 없는 '처음'의 느낌이었다. 


길을 걷다 마주한 소낙비도, 게스트하우스 야외 공유 주방에서 함께 나눠먹던 팟타이도, 빨리 감기를 한 것처럼 정신없이 북적이던 카오산 로드의 풍경도.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나는 내 눈앞의 모든 세계를 사랑했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 땀을 흘리며 맥주를 들이켜던 그곳의 풍경은 그렇게, 아주 강렬하게 나의 기억에 새겨졌다. 


어느 날엔가 여행 중 길가 상점의 벽면을 가득 채운 화려한 천들이 내 눈을 사로잡았는데 나는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 앞에 한참을 서있었다. 처음, 낯섦. 이질적으로 뒤섞이는 두 세계에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었다. 붉디붉게 물들어 터지는 불꽃을 형상화하듯 염색된 무늬는 나의 마음을 투영하는듯 했다. 그 세계는 어서 오라고 손짓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실용성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던 천쪼가리 하나가 내 손에 들려있었다.


정신을 잃어 사랑에 어쩔 줄 몰라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특이보단 특별함에 가까운, 자기만의 세계가 아주 확고한 존재에 대한 강한 이끌림. 나는 누군가의 독특함을 사랑했다. 그 사랑은 나의 세계에서 동족을 만난 것 같은 놀라움이었다.


나의 사랑은 강렬함에 매료된 채로 그 품에서 사정없이 휘둘렸다. 평화와는 거리가 멀었던 시절, 더 간절하고 더 불안하게 어딘가 아슬아슬한 기분으로 사랑을 했다. 누가 더 사랑하느냐보단 누가 더 강하게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이느냐가 중요했다. 질긴 줄다리기.


사랑. 사랑. 사랑. 

그렇게 두 세계는 허구한 날 마음을 더 주지 못해, 혹은 더 받지 못해 안달이 나있었다.


온몸에 휘황찬란한 천을 휘두르고 거리를 활보했다. 그곳에서 나는 특별하지도 튀지도 않는 거리의 행인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 세계는 그만큼 독특함으로 가득 채워진 세계였다. 그러나 이내 지쳤다. 정신을 잃을 정도의 열기를 버티지 못하고 곧장 숙소도 돌아갔다. 문을 열자 평화롭고 고요한 세계가 펼쳐졌다. 안락한 침대와 그 너머 희미하게 들려오는 백색소음. 그러나 그것이 나에게 사랑일 수는 없었다. 내가 사랑했던 강렬함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나는 나의 세계가 영원하길 바랐다. 나와 그 세계도 같은 마음이길 바랐다. 그러다 빠르게 타오를 수록 빠르게 꺼지는 법. 


이따금씩 나는 그 세계가 그립다. 여전히 나는 무언가를 사랑하고 싶다. 잡힐 듯 잡히지 않아 오래도록 기억하려 애쓰던, 때때로 아찔함을 선물하던, 열렬히 사랑하던 세계. 하지만 돌아가고 싶진 않다. 겁 없이 다른 세계를 탐하던 시절, 사랑해 마지않던 그 강렬함을 뒤로하고 나는 평안이 주는 사랑을 택했다. 휘둘리길 포기했다. 


짧았던 일주일.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돌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곳에 행복이 있다. 한결 더 편안한 사랑을, 한결 더 안전한 행복을 선택했다.


나는 이 세계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것에서 느끼는 평화를. 그것을 사랑하기로 했다. 

결국 돌아온 날들은 그런 나날들 일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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