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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린 Jan 26. 2023

삶에 관한 정리되지 않은 단상 : 그럼에도 기록하는 삶

고백록

두 번째 서른, 아직 오지 않은 새해, 어쩌면 깊고 무거운, 지극히 개인적인 그러나 우리의 이야기인. 존재적 사랑에 관한 짧은 고백.


이 글은 굉장히 복잡하고 피곤한 글일지도 모른다. 이 글은 어쩌면, 몹시 길고 아픈 글이 될지도 모른다. 긴 겨울이었던 만큼, 아니 여전히 겨울인 만큼 응축된 모든 시간들을 담아내기란 쉽지 않을 테니까. 그럼에도 다른 시선에선 희망이길 바란다.


나의 겨울은 꽤나 일찍 찾아왔다. 낙엽이 지던 그때 이미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무언가를 잃고 무언가를 미워했다. 얼마큼 더 미워할 수 있을까 괴로워할 정도로, 나는 나를 증오했다. 마음으로 수없이 많은 것들을 죽였다. 그중엔 나도 있었다. 몸부림쳤다. 그것은 매 순간 처음 마주하는 세상을 감당해 내는 과정이었거나 새로 태어나는 모든 생명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이었을지도 모른다.


내 안에 사랑의 부재를 채우기 위해 아주 깊은 심연으로 들어가 두 팔로 온몸을 끌어안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마치 족쇄처럼 그렇게 꽉 끌어안았다. 사랑해야 할 것들이 많아질수록 사랑 없는 스스로에 대한 환멸과 분노가 함께 했다. 존재적 사랑에 대한 갈증과 원망. 사랑하고자 할수록 그 무엇도 온전히 바라볼 수 없었던 현실에 대한 슬픔. 결국 외면과 도피. 그것은 나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꼴이었다.


창백한 심장을 힘껏 바닥에 내던졌다. 두근. 두근- 그때야 알았다. 난 차가워진 심장이 미치도록 무서웠다. 그래서 먼저 도려내길 택했다. 안아주라던 그 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으니까. 도려내진 심장의 자리엔 무관심과 냉대, 무의미와 같은 것들이 대신했다. 그럼에도 나는 더욱더 사랑하고자 애썼다. 아이러니하게도 말이지. 어쩌면 거짓으로 점철된 그런 사랑을. 마치 공허함에 대한 집착이 그릇된 사랑을 낳듯이.


살기 위해 작은 위로와 작은 즐거움에 더욱더 처절하게 매달렸다. 그것이라도 있어야 했다. 철저히 그리고 완벽히 내가, 내가 아닐 수 있는 순간들에. 어쩌면 내가 사랑하고 싶은, 사랑받고 싶은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그러다 어느 날엔가 현실이 태풍처럼 밀려와도 이 겨울이 너무 깊고 무거워 놓을 수 없었다. 그 겨울은 지옥이었다. 지옥이라 굳이 이름을 붙이고 싶지는 않지만 어떤 이면은 그랬다. 그건 마치 태평양과 대서양이 공존하는 것과 같았다. 반대 세상에 존재해도 결국 같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니, 공존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던 셈이다. 닿지 않지만 연결되어있는 지독한 상생. 또 다른 의미에선 삶의 양면성이거나 이중성이거나. 그러나 타인이 두 모습 모두를 아는 것은 불가능했다. 분리된 채로 살아야 그나마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아주 겨우 작은 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일종의 기만이었다. 오로지 나만이 아는 그런 거짓. 겁이 났던걸까. 연약함이라는 진실이.


결국 스스로가 자처한, 살갖을 에는 칼바람에 손등에 온몸에 크고 작은 상처가 났다. 상처가 나고 아물기를 반복했다. 끝없이 추락했다. 눈에 보이는 추락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러다 다시 날갯짓을 하기도 했다. 물론 오래 날지 못했지만. 사랑이 없이 날아오르는 자들의 결말이었겠지.


하루는 명치가 너무 아파서 크게 심호흡을 하고 들숨과 날숨을 반복했다. 그러다 숨을 쉬는 것조차 고통으로 느껴지면 힘껏 제 손으로 가슴을 미친 듯이 내리쳤다. 한 줌의 알약이 통증을 잠재우기도 했다. 어디서도 드러내지 않았지만, 아주 작은 네모 상자 안에서 눈물을 쏟아낼 때야 비로소 말라가는 영혼에 겨우겨우 한 줌의 생명수와 같은 물을 뿌렸다. 어쨌든 다시 피워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이 글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몇 번이나 등장할까. 어쩌면 내 안에 사랑이 넘치지 않는 한 계속해서 찾아 헤맬지도 모른다. 난 계속 헤맬 것이다 영원히. 아주 조금씩 그 사랑을 맛볼 테니까.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치열하고 고통스러울수록 맛보는 사랑의 경이로움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린 작지만 생각보다 큰 존재이니까. 사랑 안에 존재한다면.


이제야 조금씩 마주 본다. 심장을 도려낸 그 자리를 원래대로 돌려놓는 것부터 해본다. 결국 난 하나의 세계, 사랑이 존재하는 세계를 택할 것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철저한 분리와 균열, 독립. 죽음의 끝에 새롭게 잉태되는 세계. 결국 사랑, 사랑.


얼마나 미워할 수 있을까에 대한 사치보다 얼마나 사랑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존귀함에 더 귀를 기울이는 것. 어쩌면 나의 좁은 세계를 넓히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 아닐까.


그 길에 마주한 삶으로부터 건네받은 삶의 의미에 대한 끊임없음 질문과 나라는 존재에 대한 깊고 깊은 물음.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헤르만 헤세


“너 존재했어? 너답게 세상에 존재했어? 너만의 이야기로 존재했어?” - 이어령


사랑, 그래 사랑.

가라앉고 다시 떠오른다. 이젠 차분히, 떠오르면 된다고 속삭인다. 길고 긴 겨울이, 녹아내리기를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속삭인다. 사랑이 회복하기를, 서서히 빛을 발하기를. 그 사랑이 우리의 영혼을 보듬고 위로하기를, 그저 아무말 없이 나를 그리고 너를 그리고 우리를 품기를. 아주 간절히 속삭인다.


“그래 결국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크고 위대한, 담을 수 없을 만큼의 사랑이 필요했던 거야. 목이 말라. 아주 많이. 그러니 그런 사랑을 위해 온 마음을 다해 더 싸워야 할 수밖에 없잖아.”


결국 이것은 나의 세계가, 나의 품이 조금은 더 넓어지길 바라는 아주 간절한 고 백문이다. 매일 같이 결별을 하는 삶에 대한 기록이다. 어떻게 해야 더 사랑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의 기록이다. 그래서 이 글은 몹시 처연하고 아픈 글이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한 줌의 희망이 깃들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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