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J Sep 23. 2022

Ep 35: 쇼부

이기고 짐을 겨룬다는 뜻으로, 어떤 일에 대해 확실히 결정 지음

 실수를 하는 것이 두려웠다. 남에게는 사소한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는 사안일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사소한 실수 하나라도 큰 치명타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보고서면 보고서, 교육 훈련 계획서면 계획서, 작전 계획이면 계획, 어느 것 하나 소홀히 넘기지 않고, 내가 쏟아부을 수 있는 모든 역량들을 쏟아부었다. 그 전과 조금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던 부분은 나에 대한 대장님의 확실한 지원이었다. 모든 일에 완벽을 기하며 열심히 일을 수행하자, 주간 간부 회의와 같은 공식 석상에서 나의 칭찬을 공개적으로 자주 하시며 나의 업무에 신뢰하고 있음을 은연중에 표현하셨던 것이다. 그러한 대장님의 신뢰 기류로 인하여 부대 내 간부들과 병사들의 시선 또한 변화의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대장님의 총애를 받는 소대장으로 거듭나다 보니, 부대 내 나의 위치도 자연스럽게 높아지며, 나의 말과 행동에 다시금 무게감이 실리기 시작했다. 악몽 같았던 폭력 사건으로 인해 병신 같은 소대장이라고 욕먹었던 이후로 이룬 1년 만의 쾌거였다. 제자리라고 느껴지는 위치로 돌아오는 데, 꼬박 1년이라는 노력의 세월을 인고해야만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항상 빈둥빈둥 대던 정찰 분대장(하사, 부사관)에게 소대원 면담과 병영 생활 기록부 작성을 지시하였는데, 예상치 못한 재미있는 답변이 되돌아왔다.


"왜 소대장님 업무를 저에게 시키십니까?"
"내 업무를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정찰 분대장도 소대 내 부소대장 역할을 하는 간부이다 보니 병영 생활 기록부를 저의 지시에 따라 작성 및 보고할 책무가 있습니다."
"네? 그런 규정이 어디에 있는 겁니까?"
"자, 여기 이 규정을 읽어 보세요. 부소대장이 소대장의 관리 감독하에 작성 가능하다고 적혀있죠?"
"저는 부소대장 아니지 않습니까?"
"네에?! 뭐라고요?"
"저의 직책은 '정찰 분대장'이란 말입니다."
"지금 제게 그걸 말이라고 하나요?"
"맞지 않습니까? 아무튼 전 행정관님이 시키신 일이 있어서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또 시작되었다. 부사관과 장교의 기싸움, 그리고 직속상관을 무시하고 행정관의 지시를 우선순위로 삼으며 충성 모드로 열심히 일하는 후배 부사관들의 텃세 싸움. 그날 나는 정찰 분대장을 소대 내 모든 업무에서 배제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런 소대 업무를 가르쳐 주지 않았으며 더 이상의 지시 사항도 하달하지 않았다. 정찰 분대장은 역시나 편안해 보였다. 앞으로 그에게 어떠한 불운이 닥치게 될지 예감도 하지 못한 채, 엄청난 책임이 뒤따르는 자유를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고, 마냥 즐겁게 탐닉만 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소대 내 그의 입지는 점점 좁아졌고, 일반 병사 분대장들도 실시할 수 있는 간단한 업무들을 병사들에게 물어보면서 간신히 그의 직책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타 소대 정찰 분대장(부사관)들이 나에게 그를 잘 가르쳐주고 따라올 수 있도록 지도하여 주는 것이 소대장님의 책임 아니냐며 조심스레 건의도 하였으나, 나는 그들의 이러한 제안에 일침을 가하였다. 나는 분명 기회를 여러 번 주었지만 내가 업무 지시할 때마다 그 지시를 불이행하기로 한건 그의 결정이라고 분명히 못박았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소대 업무에 완전히 배제되며, 행정관과 보급관의 따까리 업무에만 목을 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대장인 나의 허락을 득하지 않고, 수시로 부대 병력을 마음대로 차출하여 부대 작업에 마음대로 투입하고 있는 정찰 분대장의 모습에 심기가 불편해져서 한 마디를 하게 되었다.


"정찰 분대장, 부대 작업 병력이 필요하시면, 소대장인 저에게 먼저 승인을 받으십시오."
"보급관님이 부대 예초기 작업에 2명, 장비 창고 정리에 3명, 수송관님은 차량 정비 작업에 5명 요청하셔서 이 병력들은 반드시 열외 해야 합니다."
"반드시라니요?"
"매일 같이 진행하는 부대 작업 병력 열외 시키는 것에 왜 갑자기 딴지를 거십니까?"
"딴지라.. 정찰 분대장! 상관에게 말을 할 때는 말을 가려가면서 하세요. 지금 이래저래 병력들을 모두 열외 시키고 나면, 몇 명 남지도 않는데, 이 병력으로 무슨 교육 훈련을 진행합니까?"
"원래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지금 이 병력들이 부대에서 작업이나 하려고 입대했습니까? 항상 전투 준비 태세에 완비를 해야 하지요!"
"지금 전쟁이 났습니까? 그러면 부대 작업은 어떻게 합니까?"
"앞으로는 제 소대 병력을 작업 병력으로 열외 시키려면, 제 허락을 반드시 득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소대원들의 건강과 안위는 제 책임 소관이기 때문입니다."
"저보고 어쩌시라고.. 그럼 소대장님이 병력 지원 안 해주셨다고, 보급관님과 수송관님께 보고 드리겠습니다."
"예, 그렇게 하십시오!"


 평소 배차 요청(군용 차량을 업무상으로 이용할 경우 승인을 요청하는 것)을 할 때마다 싫은 소리를 해대며 잘 협조해주지 않던 수송관과 당연히 문제없이 지급해줘야 할 훈련 물자 등의 지원비 및 부대 내 장비 물자, 보급품 등을 무기로 삼아, 이런저런 짜증을 섞어가며 바쁘다는 핑계로 소대장들을 주무르려 했던 보급관에게 한 방 먹일 기회만 엿보고 있던 찰나에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칼을 빼 든 것이었다. 나에게 주어진 교육 훈련과 병력 관리의 권한과 책임을 바탕으로 그들에게 더 이상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선전 포고를 하는 격이었으니, 텃세가 심하기로 소문난 부대에서 이러한 일을 계획한다는 것은 전쟁 선포나 다름이 없었다. 예상대로 수송관과 보급관에게 항의 전화가 빗발쳐왔다. 상황실을 지키고 있던 상황병은 잔뜩 주눅들은 표정으로 나에게 말을 건넸다.


"소대장님, 보급관과 수송관이 잠시 오라고 하십니다!"
"응, 지금은 교육 훈련으로 바쁘니, 이따가 시간 나면 방문드린다고 전해드려라."
"죄송하지만.... 그게 지금 당장 오시라고 닦달이십니다...."
"내가 직접 통화할게, 알았다!"


 온갖 신경질적인 말투로 나에게 항의하듯 불만을 표출하며 잠시 자신들의 사무실로 오라고 난리가 난 상태였다. 아무래도 내가 그들의 약점을 제대로 건드린 모양이었다. 일단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예정대로 연병장에서 단독 군장 차림으로 교육 훈련을 진행하였다. 연병장 너머에 위치하고 있는 수송관실에서 수송관께서 고레 고레 소리를 치셨다. 교육 훈련을 해야 해서 안된다고 하니, 수송부에서 정비를 하던 병사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와서는 다급한 표정으로 지금 수송부 난리가 났으니, 제발 잠시만이라도 수송관실로 방문해 달라고 애걸복걸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펼쳐졌다. 병사가 울상을 지으며 부탁을 하니, 마음이 약해져 잠시 교육 훈련을 중단하고 수송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똑똑똑!"
"아니! 소대장님 이게 뭐예요? 장난하자는 겁니까?!!!"
"왜 이리 역정을 내십니까?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지금 소리를 안 지르게 생겼습니까?!!!"
"흥분하지 마시고 차근차근 말씀해 보십시오."
"흥분을 지금 안 하게 생겼어요?! 네?!!!"
"왜 흥분을 하시고 그러십니까? 그러지 말고 대화로 해결하십시오."
"아니, 왜 갑자기 병력들을 못 보낸다고 난리를 치시는 겁니까?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
"저는 단지, 제 소대원들에게 교육 훈련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갑자기 왜 병력 지원을 안 해주시냐고요!"
"당연히 진행해야 할 교육 훈련을 진행한 것입니다. 그리고 소대원들과 관련된 모든 책임은 소대장인 제게 있기 때문에 제 소대원들을 제 허락 없이 마음대로 데리고 가시는 것은 안된다는 말을 정찰 분대장에게 전달한 겁니다."
"전 하사가 2 소대장이 앞으로 병력 안 보내줄 거라고 그랬다는데요?"
"병력을 안 보내드린 다는 것이 아니라, 제 승인을 득하고 병력들을 작업 병력으로 데리고 갈 수 있도록 말한 것입니다. 솔직히 제 병력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는 책임자인 제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음.... 그건 그렇지요.... 아무튼 오늘은 소대장님이 이런 식으로 나와서 싸우자는 건 줄 알고, 꼭지가 돌 뻔했어요!"
"하하하, 뭘 또 그렇게 말씀하시고 그러십니까? 당연히 처리되었어야 할 업무 절차가 생략됐길래, 병력 관리에 용이하도록 그 절차를 다시 만든 것뿐입니다. 제 병력이 작업 간 줄 알았는데, 혹여라도 탈영이라도 해버리면 그 책임은 누가 집니까?"
"그렇기는 하죠.. 뭐 그 부분은 저도 앞으로 유념토록 할게요!"
"아 참,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말씀드리는 건데...."
"뭔데요?!"
"수송부 배차 문제 말입니다. 왜 이렇게 불편하게 하시는 겁니까? 일부러 괴롭히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하하하, 소대장님! 똑같습니다. 저도 모든 차량 정비, 관리, 유지에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되는 차량은 배차를 안 해드리는 것이고, 갑작스러운 배차 신청도 차가 없으면 못 해 드리는 거고요!"
"솔직히, 그 배차권을 가지고 저희들을 좀 괴롭히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배차를 요청드리는 사유들은 대부분 저희들도 갑자기 지시를 받거나 들은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억울한 부분이 많습니다."
"저는 모르겠습니까? 제가 군 생활을 몇 년째 하고 있는데요?! 자꾸만 생각 없이 배차 신청하시는 보좌관님이나 통제장교님들 때문에 스트레스받아서 그랬습니다!"
"아무튼 서로 상황을 다 이해하시니까 앞으로는 잘 협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정된 안건에 대해서는 반드시 일주일 전 배차 요청을 드리겠지만, 예정에 없던 스케줄은 저도 통제가 불가능하니 이해해주시고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소대장님, 오늘 이런 얘기하려고 일부러 이런 거죠?"
"뭐, 고의성이 아예 없었다고 했다면 거짓말이겠죠? 하하하하!"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합니다! 제가 가만 안 둡니다!"
"그럼 오늘 하루도 좋은 하루 되시고, 고생하십시오!"
"아무튼 빨리 요청한 병력 좀 수송부로 내려보내 주세요!"
"전부는 못 보내드리고요, 3명만 추려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아! 소대장님, 여기 할 일이 넘치는 것 보세요! 그럼 소대장님이 와서 직접 도와주시던가요!"
"전 할 일이 많아서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하하!"
"내가 내일 또 두고 볼 거예요!!!!"


 왠지 모를 상쾌한 기분으로 수송부를 나섰다. 그 후에는 보급관을 만나서 또 한참 동안 비슷한 얘기를 반복했다. 보급관과의 대화는 수송관과의 대화보다 상쾌한 느낌은 덜 했지만, 그 날이후로 보급관께서도 나의 존재감을 인식하시면서, 내가 제안한 병력 요청 시스템에 수긍하셨다. 기싸움을 나쁜 방향으로 이어갈 의도는 전혀 없었지만, 나의 위치와 성격을 보여주기 위해 한 번쯤은 거쳐갔어야 할 단계였다. 나에게도 성격이 있고, 더 이상 괴롭히거나 헐뜯지 말라는 경고성 행위로 인하여, 그들의 괴롭힘은 그 강도가 이전보다 약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그들의 업무에 지장을 주거나 혼선을 주는 일체의 행위들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항상 모든 업무에 완벽을 기하였으며 별도의 불필요한 업무 요청 자체를 최소화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전히 나의 병력을 필요로 하였지만 나는 그들의 도움을 최소화하거나 없애 버렸으니, 이미 게임의 승자는 정해져 있는 듯 보였다.


 그렇게 수송관과 나는 그날 이후로 묵언의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수송관께서도 당돌했던 나의 행동이 마음에 드셨는지, 그 이후에는 나를 '최애 소대장'이라고 칭하며 더 이상 배차 신청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다른 소대장님과 통제장교님, 보좌관님과는 여전히 서로 으르렁 거리면서 신경전을 벌이는 중이었기 때문에, 종종 내가 중간에서 배차 문제를 중재해 줘야만 하는 상황이 생기기도 했다. 쉽게 갈 수 있는 길들이 차고 넘치는데, 왜 이리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났는지, 참 유치하면서도 쉽지 않은 것이 인간관계임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꼈던 순간이었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상황을 말하자면, 부대 부사관 중 가장 계급이 높았던 주임 원사께서도 행정관의 텃세에 밀려 매일 같이 괄시를 받고 계셨으니, 이 문제는 오로지 장교와 부사관 사이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본인들이 잘났다고 믿던 본인들이 바로 이 문제의 본질이었던 것이다.




 부내 내 나의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부단하게 노력하였지만, 항상 쉽지는 않았다. 일을 잘하고 이쁨을 받으면, 이쁨을 받는다고 시기하고, 일을 못하면 못한다고 질타당하고 무시당하는 쉽지 않은 인간관계 속에서 서로 간의 이해 상충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서 끝없이 고민했지만, 부사관들의 텃세는 쉬이 사그라들 줄 몰랐다. 행정관의 뒷배를 무기 삼아 공격적이고 모욕적인 언행들도 서슴지 않는 수많은 행정관 주니어들의 상대를 까내리며 본인들을 치켜세우는 건방진 태도들은 분명히 큰 문제였다. 수직적인 상하 계급에서 비롯되는 자격지심과 이해관계 충돌로 인하여 부사관과 장교 사이의 계급 구분을 없애지 않고서는 이러한 고질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비단 장교와 부사관 사이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자신의 권력을 무기로 삼아 그러한 분위기를 조장하는 행정관과 이에 동조하며 충성스럽게 따라가는 후배 부사관들의 행동에는 큰 문제가 있었음이 분명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들의 군 생활 말로는 그다지 아름답지가 않다. 그들의 악명 높은 텃세가 당장은 그들의 권세를 유지하게끔 만들어줬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악명으로 인해 모두 나락의 길로 인도되고 있었음을 그들은 인지하지 못했다.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힌 그들의 시야로는 올바른 길을 찾는 것이 불가능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고로 사람은 항상 자비로움과 겸손함의 미덕을 갖추어 선을 행할 줄 알아야 한다. 악은 악을 부르고, 선은 선을 부르기 때문이다. 아주 간단하지만 행하기 쉽지 않은 이 미덕을 행하는 이에게는 덕이 쌓일 것이고, 행하지 않는 이에게는 가까운 미래에 화가 몰려올 것임을 분명히 인지하기 바란다.


나쁜 짓을 저지르는 자만 악인이 아니라,
남의 마음에 악을 싹트게 하는 자도 악인이다.
작가의 이전글 Ep 34: 날갯짓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