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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J Jun 09. 2022

Ep 14: 노력상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해 부지런히 애를 써서 받는 상

중학교 2학년, 다이어리가 유행하는 시기였다. 나는 우연히 누나로부터 투명 핑크 실리콘 재질의 다이어리를 손에 넣게 되었다. 색깔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내용물이 중요하니 크게 개의치 않았다.


'달력도 있고, 메모장도 있고, 계획적인 삶을 살아봐야겠다"


성적이 하위권이다 보니 이러다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이어리를 펼쳐서 그동안 뒤쳐진 공부를 따라잡기 위해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수학이 많이 부족하니, 수학을 처음부터 집중적으로 공부해야겠다!'


그렇게 결심을 세운 후, 수업 시간에 선생님 말씀에 집중하며 진도를 열심히 따라가기 시작했다. 교과서에 자로 밑줄도 긋고, 선생님이 칠판에 적어주시는 내용들을 빠짐없이 필기하며 학구열을 조금씩 불태우기 시작했다.


'활유법과 의인법의 차이는 뭐지?'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자 없이도 빗변의 길이를 알 수 있으니 실생활에 유용하겠는걸?'

'π(파이)는 어떻게 3.14 xxxxx일까?'


공부를 하면 할수록 질문도 많아졌고, 그런 의문들을 해소하기 위해 메모를 해두었다가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들께 몰래 찾아가서 질문을 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스스로 마음을 다잡으며 학교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한동희라는 같은 반 친구도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무섭게 공부를 해대기 시작했다.


한동희(가명)라는 친구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하자면 키는 나와 비슷하게 작은 편이었지만, 몸이 워낙 근육질이고 단단해서 공중에서 강하게 날아오는 축구공도 맨 주먹으로 바로 맞받아쳐대는 무시무시한 싸움꾼이었다. 실제로 싸움 실력도 좋아서 따까리들을 2~3명 끌고 다니며 으스대는 녀석이었다. 그 녀석도 선생님께 그만 맞고,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을 섰는지, 반에서 1~2등 하는 얘들한테 필기한 노트를 빌려달라고 한 후 본인의 노트에 열심히 옮겨적고 있었다. 나와 성적이 비슷했던 녀석이어서 은근히 경쟁의식이 붙었던 나는 나만의 방법으로 그 녀석과 경쟁을 할 심산이었다. 그 녀석이 한마디를 내뱉는다.


"아, 씨발, 너무 피곤해서 수업시간에 졸았네.. 필기를 못했어! 젠장!"

"어? 내 거 보여줄까? 나 필기해놨는데?"

"어? 됐어! 넌 공부 못하잖아! 저기 1등 꺼좀 빌려와야겠다! 야! 만수야! 1등한테 가서 노트 좀 빌려와라!"


나를 대놓고 무시하면서 본인 따까리를 시켜서 상위권 아이 필기 노트를 빌려오게 하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자존심이 상하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 자식이, 나를 무시하네?'


속으로 분노를 삼키며 책가방에서 다이어리를 꺼낸 후 맨 뒷장을 폈다. 그리고는 그 녀석의 이름을 빨간펜으로 적어 나갔다. "스스슥" 빨간색으로 '한동희' 이름 세 글자를 나의 다이어리 맨 뒷장에 적어놓고는 스스로 다짐했다.


'너는 내가 이긴다! 반드시!'


우연찮게 강한 동기부여를 얻게 된 나는 와신상담했다. 지치고 힘들 때곤 다이어리의 맨 뒷장을 쳐다보며 그때의 감정을 잊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였으나 족집게 과외식의 공부를 하는 그 녀석을 앞지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시험을 볼 때마다 미세하게 상승하는 나의 성적과 달리, 그 녀석은 상한가를 치듯이 35등에서 15등으로 그리고 7등으로 무섭게 선두권을 위협하며 성적이 향상되고 있었다.


원래 남에게 부탁을 하기 꺼려하던 나의 성격상 그 녀석처럼 상위권 얘들 노트를 빌려서 요점 정리를 얻지 못해 상대적 박탈감이 컸지만, 나는 나의 방식대로 기초부터 탄탄히 그리고 꾸준히 공부를 이어갔다. 나 역시 반 성적이 39등에서 20등권 안까지 진입하기는 했지만 그 녀석의 성적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동희, 이 자식은 나를 경쟁자로 생각도 안 할 텐데.... 생각할 필요도 없을 거고....'


홀로 외로운 싸움을 해가며 그 녀석을 이기기 위해 노력을 하다 보니, 나에게 수학 문제 풀이를 물어보는 친구도 생겼고, 필기 노트를 빌려달라는 친구도 생기고 있던 참이었다.


'그래, 누군가 인생은 42.195km 마라톤이라고 했지! 네가 지금은 전속력으로 달려 나가고 있지만 나는 페이스를 유지하며 추격 중이다! 기다려라!'


 그렇게 중학교 2학년 생활은 그 녀석의 압도적인 승리로 마무리되었지만 나도 나름대로 많이 성장할 수 있었던 한 해였다. 3학년으로 올라갈 때 반이 섞이면서 그 녀석과는 다른 반으로 배정을 받았지만 나는 꾸준히 공부를 열심히 해서 반에서 50명 중 10위권의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녀석은 공부에 흥미를 잃었는지 중위권으로 성적이 떨어졌고, 뒷조사를 조금 해보니 날라리 여학생들을 만나 그 짓거리를 하느라 정신이 팔려서 혼이 쏙 빠져있는 듯 보였다. 담배, 술, 놀이 비용 등에 돈이 궁했는지 깡패짓을 하며 다닌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제깟에는 고등학생들 삥 뜯었다며 자랑하고 다니는데, 한 때 나의 경쟁자였던 녀석이 저렇게 망가졌다는 사실에 씁쓸한 기분과 동시에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결론적으로는 나의 승리가 확실시되는 분위기였지만 추락하는 경쟁자로 인해 그 승리감은 미비하였다.


중학교 졸업식 시간이 다가왔다. 대강당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상장 수여식을 하고 있었다. 상 받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나는 아무 기대도 없이 졸업식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조금 더 열심히 했으면 우등상을 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쉬움에 홀로 사색에 잠겨 이 생각 저 생각을 하고 있는데 교단 마이크를 통해 내 이름이 흘러나왔다.


"JJ, 최수환, 김상호"

"JJ, 최수환, 김상호 그 자리에서 일어나 주세요!"


내 이름을 부른 것이 맞는지 얼떨떨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자, 옆에 있던 친구들이 너 이름 불렀으니 어서 일어나라고 보채기 시작했다. 얼떨결에 앉은자리에서 일어났고 자연스레 동급생들은 우리 셋을 주목하게 되었다.


"자! 모두 이 세명의 학생들을 주목하도록!"


많은 학생들이 웅성웅성거리며 쳐다보니 괜히 어색하고 창피해져서 얼굴이 불그스레해졌다.


"여기 서있는 이 세명의 친구들은 전년대비 내신성적이 전 과목에서 2등급 이상 상승하여 이 노력상을 수상 받게 되었습니다. 노력상은 우등상보다 더 어려운 상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3명밖에 수상할 수 없고요. 솔직히 3명이나 나왔다는 것도 상당히 많은 것 같습니다. 자~우리 노력상을 수상한 이 세 친구들을 위해 우레와 같은 박수를 칩시다!"

"우와~! 짝짝짝짝!!!!"


그동안의 설움과 고생이 모두 씻겨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의 라이벌은 수여식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무언가를 성취해 보신 경험이 있습니까?"


누군가 나에게 이 질문을 한다면 나는 단연코 중학교 시절 노력상을 받은 이야기를 할 것이다. 실제로 회사 입사 인터뷰를 할 때 이 대답을 했던 기억이 난다. 사소한 자존심의 상처로 인하여 서투르게 스스로 동기부여를 했고, 그 동기부여를 망각하지 않기 위해 유치하게 그 녀석의 이름을 빨간펜으로 다이어리 맨 뒷장에 적어놓았다. 그리고 수시로 그것을 보며 소심한 복수를 꿈꾸었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이래로 우등상을 받아 본 경험이 없다. 하지만 중학교 시절에 수여받은 노력상은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해 준 나의 노력의 산물이고, 큰 보람을 느낄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그렇다고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힌 채 현재에 적응하지 못하고,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그런 사람으로 기억되긴 싫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노력을 해야 할 시점은 바로 지금이 아닐까?


Never says N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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