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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J Jul 21. 2022

Ep 22: 영자 신문사

영문으로 기사를 작성하고 인쇄, 배포하는 학교 부속 기관

 학과 생활에 지쳐갈 때쯤 대학 생활의 꽃이라고 불리는 동아리 활동 검색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땅히 마음에 드는 동아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헤매고 있을 때쯤, 영자 신문사 수습기자 모집이라는 문구가 나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용기를 내어 다가가 지원 방법 등을 문의하여 보니, 단순히 지원만 하면 되고, 학기당 학점 3.0 이상을 유지하면 학교로부터 장학금도 받을 수 있다고 선전하였다. 왠지 모르게 꿩 먹고 알 먹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영어 공부도 할 수 있고, 장학금도 탈 수 있다니, 일석이조도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그렇게 고민도 없이 입사 지원서를 제출하고 합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합격 통보 문자 메시지를 바로 받게 되었다.


 너무나도 빠른 진행 사항에 다소 불안한 마음이 피어올랐지만, 한편으로는 합격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자 신문사라는 타이틀이 말을 해주듯, 영자 신문사 수습기자로서의 삶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선배 부장 기자님 들과 기사를 취재하러 다녀야 했고, 취재한 기사들을 토대로 사진을 찍어서 인화하고, 기사를 작성해야 했으며, 영문 잡지 레이아웃 점검 및 교내 곳곳에 위치하고 있는 신문함에 잡지 형태의 신문을 배달하는 과정까지, 상당한 인내와 시간을 투자하게끔 만드는 신문사 생활이었다. 그래서 많은 지원자들이 2~3달을 못 버티고 그만두기 일쑤였고, 그러한 인력난 속에서 내가 당당히 지원하여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함께 지원했던 친구는 자유시간이 없고, 편입 공부를 해야 한다는 핑계로 얼마 가지 않아 그만두었지만 나는 '내가 이것도 못 버티면 어디 가서 뭘 하고 먹고살까?'라는 오기가 생겨서 버티기 모드로 돌입했다. 적어도 나에게 욕과 구타를 자행하지는 않았고, 선배님들이 맛있는 음식들도 자주 사주시다 보니, 업무는 고되고 힘들었지만, 그럭저럭 버틸만하였다. 간혹 주객이 전도되어 학과 생활은 전혀 하지 않고, 신문사 생활에만 전념하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나는 학과 수업이 나의 우선순위임을 잊지 않기 위해 항상 애썼다. 그렇게 일 년에 4번의 잡지를 발행하는 가운데 힘겹게 내 생애 첫 번째 영문 잡지를 출간하게 되었다. 나의 이름과 사진이 당당히 새겨져 있는 영문 잡지를 펼쳐보다 보니, 그 간의 설움과 괴로움은 어느새 환희와 감격으로 전이되었다. 편집장 선배님께 수없이 퇴짜를 맞고, 꾸지람도 받았지만, 내 기사를 8,000명 남짓의 학우들과 공유할 수 있다는 채널이 생겼다는 것에 대한 성취감과 보람은 이루어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소정의 비리들도 나의 눈에 포착되었다. 수습기자는 성적 조건을 만족하여도 장학금을 수령할 수 없고, 편집장에게 반납해야 한다는 독소 조항을 뒤늦게 알려준 것이다. 그 장학금들은 편집장 개인 통장으로 이체되어 영자 신문사 운영 자금으로 사용되었는데, 청렴하지 못한 자가 편집장이라도 하게 되면, 그 돈을 어디서 어떻게 썼는지를 알아낼 방도도 없었다. 그렇게 한 번의 사이클이 끝나고 나니, 영자 신문사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고, 상당부문의 의문 또한 해소되었다. 편집장 선배님이 밥을 자주 사주셔서 죄송한 마음에 내가 밥을 사드렸던 행동이 이곳에서는 심각히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추후에는 사주는 대로 얻어먹기로 결심하였다. 그 돈에는 내가 수습기자여서 송금한 나의 장학금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나는 수순에 맞춰 정기자로 진급하였고, 2학년으로 올라가는 시점에는 문화 부장이라는 타이틀도 얻게 되었다. 매 학기 3.0 이상의 학점을 유지했던 나는 다른 동기생들과 다르게 정기자 이후부터는 장학금을 따박따박 타 먹었다. 비록 그 당시 큰 금액의 장학금은 아니었지만 후배들 밥 사주고 술 사주기에는 어느 정도 여유로움을 느끼게 해 줄 만큼의 금액이었으니,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신문사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성적이 미달되는 다른 친구들은 성적이 부족하여 장학금을 못 받을 상황에 처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되면 편집장 선배님은 신문사와는 전혀 상관도 없는 학점 3.0 이상의 친구들에게 명의를 빌려오게끔 압박하였고, 영자 신문사 기자인 것처럼 문서를 조작하여 장학금을 그들의 계좌로 송금받을 수 있게 만들었다. 장학금을 수령받은 학생에게는 수고비조로 10만 원을 떼어주고, 장학금 못 받은 기자 동기생 또한 10만 원 정도의 용돈을 손에 쥐여 주게 되면 공금 횡령은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그 외의 모든 나머지 금액은 신문사 운영비 명목으로 편집장의 개인 계좌로 회수를 하였다. 딱 봐도 옳지 못한 부조리였지만, 그 돈이 신문사 운영비로만 사용된다면 불만은 없었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이 상황을 함구하고 비밀에 부쳤다. 그야말로 내로남불이 따로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 방법 외에는 신문사를 제대로 운영할 재간이 없었다. 아무튼 이러한 비겁한 자기 합리화를 통감하며, 1년 후에는 영자 신문사 내에서 문화부장으로 진급하였고, 방송부, 교지, 학교 신문사, 영자 신문사를 통틀어 부르는 언론 출판인 연합회, 일명 언출련에서 정책국장 직책을 이어나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얻어보는 큰 직책에 완장의 무게감을 느꼈고, 출판인으로서의 사명감도 되새기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그 후에도 꾸준히 신문사 업무를 진행하였으나 학군단을 지원함으로써 짧고 굵었던 나의 신문사 생활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따금씩 선출된 총학생회장이 잘 부탁드린다며 술과 안주를 싸들고, 학교 본관 5층에 위치하고 있는 언출련을 방문할 때면, 우리네들은 저놈이 더러운 놈인지, 깨끗한 놈인지 분간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때도 있었다. 학생들이 내는 총학생회비로 이렇게 술을 마셔대며 돈을 허비한다는 게 열받기도 하였지만 꼬투리를 잡아낼 방도는 없었다. 마음속으로는 항상 교내 언론인으로서 공명정대할 것이라고 다짐하였지만, 학교 내에서도 이렇게 소규모의 비리와 정치적 행보가 여전하다는 사실에,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의구심까지 들게끔 하였다.


결국 인간이 문제인가?


 인간의 존재에 대한 시시비비는 여러 가지 해석이 난무할 수 있으므로 이번 화에서는 다루지 않기로 하겠다.


 여하튼 첫 장학금을 받았을 때는 부모님께 각각 10 만원씩 용돈을 드리고 복 불고기 집에서 처음으로 밥도 사드렸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우리 아들이 장학금을 받았다며 즐거워하시던 부모님의 행복했던 얼굴 표정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현실은 최저 시급의 급여도 못 받아가며, 학생의 신분으로 장학금이라는 명목 하에 학교 신문사 직원으로서 근무하던 학생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어쩌면 나의 첫 사회 경험은 동아리인 줄 알고 들어갔던 영자 신문사 수습기자가 아니었을까 자문하여 본다. 나는 항상 쉬운 길보다는 어려운 길을 선택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나도 쉬운 길을 선택하고 싶다. 하지만 인생 본연의 맛은 쉬운 길보다는 어려운 길에 있음을 강조하며 글을 줄인다.


어찌 보면 어려운 길은 남들이 함부로 못 오는 나만의 길이 될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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