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생각 없이 부모님이 하라는 대로, 세상이 원하는 대로 살아오다 보니, 나는 이 세상의 부품이 되어있었다. 주요 부품이면 좋으련만 무엇에 떠밀려 무엇이 바빴는지, 언제든지 교체 가능한 그런 부품 말이다. 결국 내 인생을 살아온 것은 타인이 아닌 나 스스로 이기에, 그 누구를 탓하거나 원망 섞인 불평불만을 늘어놓을 수도 없다. 그러고 보면 인생은 단 한 번의 기회만 제공하여주는 매우 비정한 게임인 것만 같다. 간혹 재도전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에 소요되는 막대한 시간과 자원의 중압감은 일반인이 감내하기 쉽지 않다. 더군다나 나이가 들면 들수록 책임감이라는 무게까지 지탱해야만 하니 어려운 선택임에는 의심할 여지가없다. 요란한 마찰음을 일으키며 살아가는 것은 힘들고 옳지 못하다는 사회적 통념에 스스로를 내려놓고, 남들에게 뒤처질까 두려워, 조급한 마음으로 첫 단추도 제대로 채우지 못한 채 성급히 따라가다 보니, 잘못 끼운 단추를 다시 끼우기에는 이미 너무나 많은 단추를 채워놓은 상태라 옷맵시를 수정하는 것을 허락해 주지 않는다. 어찌 보면 변명과 핑계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막상 생계를 고민해야 할 대다수의 노동자들에게는 이런 사소한 생각을 하는 시간조차 사치로 비춰질 수 있다.
배우고 싶어도 배울 형편이 안 되는 자들은 그렇게 또다시, 단 한 번뿐인 그들의 인생을 이미 권력을 소유한 이들을 위해 몸 바치고 희생한다. 가난의 세습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꼴을 바라보는 부와 권력의 세습자들에게 그 광경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워 보일까? 현대판 자발적인 노예제도의 판을 짠 이들의 첨예하고 기발한 아이디어에 혀를 차게 된다. 노예들이 노예인 줄 모르고, 자발적으로 열심히 살아가게 만드는 이보다 더 효과적이고 창의적인 세계가 또 존재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겉으론 보기엔 모두가 똑같은 인간일 뿐, 그 어디에도 노비 문서나 속박 따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언제든지 교체 가능한 노비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나'라는 존재가 인류를 위해 공헌할 수 있는 부분은 과연 노동력과 세금밖에 없는 것일까?
'지구가 멸망한다면, 생존 VIP 리스트에 내가 포함될 수 있을까?'
이리 생각해보고, 저리 생각해봐도 인류를 위해 혁혁히 공헌할 만한 어떠한 기술과 능력도 나에게는 없는 것 같다. 무채색을 강요하는 세상에서 색감을 가지고 살아남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지만, 나의 식견이 좁아 피라미드의 꼭대기를 바라 볼 엄두는 내지도 못하였고, 그들의 노예를 자청하며 이렇게 시스템에 녹아들었나 보다. 피라미드의 말단이라도 그 부분에서 Top을 찍는다면 필요에 의한 '생존 VIP 리스트'에 포함될 수 있었을 텐데, 너무나도 평범하고 특색 없이 지내온 나의 지난 나날들이 안타깝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나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두 손을 맞잡고 두려움에 잠 못 이루며 죽음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인류를 대표하여 소수의 선택된 각 분야 전문가들은 이삿짐을 싸고, 준비된 벙커로 이동하기에 바쁘겠지만 우물 안 개구리처럼 내가 바라보던 세상에서 최고의 일꾼이라고 자부했던 한 무명인은 내일의 죽음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부디 고통 없이 죽기만을 염원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