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극복 프로그램 EMDR과 글쓰기
불면증이 많이 호전되었을 때도 아주 오랫동안 낮에는 괜찮다가도 해가 지기 시작하면 잠깐씩 ‘오늘 밤은 잘 잘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불안할 때가 많았다. 그 불안감은 잠잘 시간이 다가올수록 조금씩 증폭되어 잠자리에 누우면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가슴이 벌렁거리곤 했다. 어떤 때는 열이 싸악 오르면서 온몸이 더워져 이불을 덮을 수가 없었다. 어디선가 심장이 차가워져야 잠이 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는 더더욱 열이 나면 곧바로 이불을 거둬냈다.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열이 나면 잠을 잘 못 잘 것 같은 두려움이 밀려온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힘이 조금은 생겼다. 스스로에게 ‘괜찮다’고 속삭이며 심호흡을 하는데 집중하면 어느 순간 몸의 열기가 가라앉고 심장박동도 제 속도를 찾는다.
때로는 이제는 제법 나 자신을 잘 컨트롤하고, 마음의 근육도 단단해졌다고 뿌듯했던 적이 있다. 잠을 잘 자면서 불면에 대한 공포보다 ‘이젠 나도 잘 잘 수 있다’는 자신감이 더 커졌다고 느낀 적도 많다. 그럼에도 아무 이유 없이 또 잠을 못 자면 공든 탑이 무너지듯 자신감이 뚝 떨어지고 그 자리에 공포와 두려움이 들어선다. 그때마다 몇 개월의 혹독했던 불면의 밤이 트라우마가 되어 내 마음에 큰 상처를 냈음을 확인하곤 한다.
대체 이 트라우마는 언제까지 갈까? 또 나는 언제 온전히 내 힘으로 잘 잘 수 있을까? 질문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안다. 이런 질문을 자꾸 하다 보면 오히려 트라우마를 더 촉발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 생각 없이 눕기만 하면 바로 잠들던 시절이 너무 그리워 자꾸 하게 된다.
하지만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다. 원인은 다르지만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사람들은 아주 많다. 비슷한 처지인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결국 트라우마는 평생 안고 가는 것인 것 같기도 하다.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프로그램 중 EMDR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이 프로그램은 뇌 중에서도 감정을 관장하는 ‘편도체’에 저장된 트라우마를 꺼내 트라우마를 일으켰던 당시 상황이 닥친 것처럼 만든 뒤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후 다시 뇌에 저장하는 치료이다. 편도체에 저장된 두려움과 불안함을 안도감으로 재 저장하는 과정이다.
나는 이 과정을 글로 대신했다. 사실 잠을 못 잔 날은 일부러 트라우마를 편도체에 꺼내지 않아도 바로 소환된다. 하지만 스스로를 안심시키는 일은 그냥은 안 된다. 의식적으로 뭔가를 해야 하는데, 글로 정리하는 것이 비교적 간단하다.
나는 어제 잠을 못 잤다(상황) -> 불면증이 재발한 것일까 두렵다(트라우마) ->아니다. 비록 어제 잠을 못 자긴 했지만 지금 컨디션은 괜찮다. 조금 피곤하긴 하지만 예전에 한참 불면증이 심할 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겁먹지 마라. 잠을 못 잤으니 피곤할 것이라는 생각이 오히려 몸을 피곤하게 만들 뿐이다.
이런 식으로 글을 나를 달래는 방법이 나에게는 꽤 효과적이었다. 트라우마는 생각보다 끈질기지만 트라우마가 찾아올 때마다 이런 방법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괜찮다고 기억을 재 저장한 덕분에 지금은 트라우마를 진정시키는 시간이 많이 짧아졌다. 트라우마 자체는 쉽게 없어지지 않지만 트라우마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보고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면서 많이 무뎌진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