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정우 Dec 08. 2020

번외 7 : 제1차 중동전쟁(1948) 2편

지난 이야기에 이어...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 중요한 사건이 하나 더 더해지면서 아랍인들의 유럽 서구 열강들을 향한 증오는 더욱 커지고 만다. 바로 1917년 11월 2일 유대인들과 맺은 '벨푸어 선언'이다. 여기에는 러시아 태생의 화학자이자 교수였던 유대인 바이츠만의 역할이 컸다. 영국은 독일과 전쟁이 터지자 화약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대량의 아세톤이 필요했다.


하임 바이츠만 @네이버 은하수님 블로그 / 아서 벨푸어 @위키백과

하지만, 영국은 이전까지 독일로부터 아세트산 칼슘을 수입해 아세톤을 만들어왔기 때문에 맨체스터 대학에서 생화학 교수로 재직 중이던 바이츠만에게 도움을 구한다. 이때 바이츠만은 옥수수 전분으로 아세톤을 만드는 '바이츠만 공정'을 개발해냈고 영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는데 큰 공을 세우게 된다.


그래서 영국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 국가 건설을 지원해달라는 바이츠만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한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원래 영국은 바이츠만에게 아프리카 우간다에 유대인 국가를 세워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바이츠만은 이렇게 말하면서 반드시 예루살렘이 있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 국가를 건설해줄 것을 요구했다.


"벨푸어씨, 만일 내가 런던 대신 파리를 제공한다면 당신은 받아들이겠습니까?"

Mr. Balfour, suppose I was to offer you Paris instead of London, would you take it?


"그러나 바이츠만 박사님, 우리는 런던을 갖고 있는데요?"

But Dr. Weizmann, We have London!


"맞습니다. 그러나 런던이 습지였을 때 우리는 예루살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True, but we had Jerusalem when London was a marsh


이런 대화를 나눈 뒤, 결국 영국은 로스차일드 가문과 미국의 유대인들에게 금전적 지원을 부탁하면서 그들에게 시온주의자들의 오랜 염원이었던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 국가 건국을 약속하는 '벨푸어 선언'을 한다. 그러나 이렇게 맺어진 벨푸어 선언은 중동에 아랍 국가 건국을 지원한다는 맥마흔 선언과 분명 대치되는 선언이다.


하지만, 이런 사정을 알리 없었던 유대인들은 세브르 조약 이후 확실해진 벨푸어 선언을 굳게 믿었고 나라가 채 세워지기도 전부터 세계 각지로부터 이주해왔고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땅을 하나 둘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아랍인들과 유대인들의 갈등이 시작된다.


아랍인들은 갑자기 자신들의 터전에 들어와 자리 잡은 유대인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영국의 개입과 중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떠한 합의점에도 다다르지 못한 채 다투기만 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석유가 다시끔 중요해지자 영국은 친아랍 노선을 택한다. 아직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전이었지만 미국에 있는 유대인들은 영국이 좋든 싫든 연합군 편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전까지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던 영국은 1939년 맥도날드 백서를 일방적으로 발표한다.


Protest against Macdonald's White paper @Wikiwand

맥도날드 백서를 계기로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지역으로의 이주는 크게 제한되었고 팔레스타인의 토지를 살 수 있는 권한 역시 대폭 축소되었다. 여기에 팔레스타인 지역에 아랍인과 유대인이 공동으로 통치하게 될 팔레스타인을 만든다는 내용까지 들어있었다. 한마디로 팔레스타인 지역에 순수 유대 국가 건국을 영국이 더 이상 지지하지 않는다는 말이나 다름 없었다.


여기에 맥도날드 백서가 유대인들에게 더 잔혹하게 다가왔던 이유에는 히틀러가 있었다. 1933년 1월에 수상으로 임명된 히틀러는 1934년 8월부터 독일 총통이 되면서 본격적인 유대인 핍박에 들어갔다.


Adolf Hitler @New York Times

그는 광적으로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1935년 9월 5일부터 통과된 뉘렌베르크 법을 따라 독일인과 유대인들을 격리시키더니 결국 1940년부터는 유럽에 남아있던 유대인들을 강제 수용소로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우리 모두가 아는 것처럼 유대인 말살 정책의 시행으로 제2차 세계대전 동안 600만명의 유대인들이 희생당하는 홀로코스트가 일어난다.


다행히 전쟁이 끝난 뒤 1945년 트루먼이 미국 대통령이 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게 된 미국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트루먼이 대통령이 되면서부터 이스라엘의 유대 국가 건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게 된다. 하지만, 중동 지역에 유대 국가를 건설할 경우 일어날 마찰을 익히 알고 있던 영국은 유대인의 유대 국가 건설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US President Harry S. Truman @US Embassy Seoul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부와 권력은 영국을 떠나 미국에 있었다. 영국은 더 이상 이전의 대영제국이 아니었다. 이에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가 끝무렵에 다다를 때 쯤에 미국의 지원을 받은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유대인 지하 민병 조직, '하가나(HAGANAH)'를 결성한다. 그리고 여러 시온주의 무장 폭력 단체(Stern이나 Irgun)를 조직해 본격적인 군사 활동을 보여주며 팔레스타인에서 격렬하게 저항한다.


결국 아무것도 해결되지 못한 채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 기간은 점점 끝을 향해 가고 있었기에 영국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음을 인정하고 1948년 5월 15일을 기점으로 UN에 모든 무제를 이관한다고 발표한다. 그래서 UN에서 먼저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1947년 4월 2일 중동 국가와 이스라엘에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제시한다.



* 출처 및 참고자료는 1편과 동일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번외 6 : 제1차 중동전쟁(1948) 1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