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들이 밀어주는 것 같았다." - Adolf Galland
매거진 발행을 위해 기존에 작성한 글들을 검토해 새로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휴대폰으로 읽기에는 불편하실 수 있으니 되도록 PC로 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1939년 하인켈이 He 178의 성공적인 비행 후 He 280 제작에 들어가고 있을 때, 메서슈미트(Messerschmitt)도 독자적인 제트 전투기 개발에 착수했다. 다만, 하인켈이 폭격기를 생산해주길 원했던 독일 항공성(RLM)으로부터 외면받은 것과 달리 메서슈미트는 독일 항공성의 지원 아래에 나름 순조롭게 개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시작은 1930년대 중반 Hans von Ohain 박사가 하인켈과 제트 엔진을 개발하고 있을 때부터였다. 당시 제트 엔진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독일 항공성은 제트 엔진에 관심을 가지며 1938년, 독일 항공성(RLM)은 BMW와 Junkers에 제트 엔진 개발을 의뢰했고 동시에 메서슈미트에는 제트 엔진을 탑재한 새로운 전투기 개발을 의뢰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사내 프로젝트에 불과했던 하인켈의 제트 항공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당시 Bf109 전투기의 개발을 막 마치고 경합에 집중하고 있었던 메서슈미트는 독일 항공성의 의뢰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은 채 볼데마르 보크트(Woldemar Voigt) 박사가 이끄는 연구팀에 설계를 맡겼고 그렇게 1939년 4월부터 P.1065라는 이름으로 제트 전투기 개발이 시작되었다. 이후 1939년 6월에 완성된 기체는 꼬리 날개를 제외하면 양 날개에 제트 엔진이 자리 잡고 있어 He 280과 비슷했으며 2년 뒤인 1941년 4월에 왕복 엔진을 탑재한 시제기가 제작될 정도로 빠르게 개발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Me 262와 함께 개발 중이었던 BMW 003 엔진이 개발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Me 262의 개발을 지연시켰다. 게다가 오랜 기다림 끝에 완성된 BMW 003 엔진은 툭하면 고장 나기 일쑤였다. 그래서 1941년 11월, 처음으로 Me 262에 탑재되어 진행된 시험 비행에서 Me 262 V1은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Jumo 210 왕복 엔진을 기수에 탑재했고 우려대로 BMW 003 엔진은 이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를 일으켜 조종사는 왕복 엔진을 사용해 비상착륙 해야만 했다. 결국, Me 262에는 비슷한 시기 BMW와 함께 개발 중이었던 Jumo 004 엔진이 장착되기로 했고 V2부터는 피스톤 엔진에 의지하지 않고 1942년 7월 18일, 온전히 제트 엔진(Jumo 004)만으로 이륙하며 비행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제트 엔진은 시작에 불과했고 다른 어려움도 많았다. 우선, 메서슈미트의 핵심 인물이었던 Willy Messerschmitt는 이미 뛰어난 성능을 보여주고 있는 기존의 왕복 엔진 전투기 생산에 집중하고 싶었으며 독일 항공성 역시 왕복 엔진 항공기만으로도 충분히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이 때문에 제트 전투기는 분명 흥미로운 무기였음에도 우선순위에서 밀려 Me 262는 연구 지원이 축소되는 위기를 겪기도 했다. 게다가 1940년 2월에는 히틀러가 18개월 안에 실용 가능한 무기를 제외하곤 모두 중단시키라는 명령을 내리는 바람에 BMW 003 제트 엔진 역시 개발이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Me 262는 초기 제트 전투기들의 특징들을 잘 보여준다. 우선, 1940년대에 개발된 제트 엔진들은 신뢰도와 추력이 낮았다. 그래서 초기 제트 전투기들은 주로 단발보다는 쌍발로 설계되었다. 단발 제트 엔진 항공기는 엔진의 신뢰도가 어느 정도 올라가고 하나의 엔진만으로도 충분한 추력을 만들어 낼 수 있고 나서부터였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지만 초기 제트 엔진은 개발이 순조롭게 흘러가지 않아 여러 차례 시행착오를 겪으며 개발되었다. 그래서 1930년대 말에 설계된 P.1065도 처음에는 엔진이 날개 안에 묻힌 형태로 설계되었지만, 엔진 개발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면서 끊임없이 바뀌는 엔진을 수용할 수 있도록 날개 아래 포드(pod) 형태로 엔진 위치가 변경되었다. 그리고 날개 아래에 포드 형태로 엔진을 장착한 덕분에 엔진의 장탈(removal)이 쉬워지면서 새로운 엔진을 시험해보기도 쉬워졌다. 물론, 이러한 설계는 초기 제트 엔진의 짧은 수명과 낮은 신뢰도에 따른 엔진 교체 및 정비의 용이성을 고려한 설계이기도 했다.
그리고 기수 앞에 위치한 프로펠러가 땅에 닿지 않도록 후륜식 착륙장치가 사용되었던 기존 왕복 엔진 전투기들과 달리 제트 전투기들은 오늘날 흔히 사용되는 전륜식 착륙장치를 사용했다. 이러한 점은 앞서 언급한 Me 262 V1에서도 볼 수 있는데 기수 앞에 왕복 엔진이 장착된 Me 262 V1을 비롯해 세 번째 시제기인 V3까지는 후륜식 착륙장치를 사용한 반면 제트 엔진만 장착된 양산형 Me 262는 전륜식 착륙장치를 사용했다. 참고로, V는 독일어로 ‘실험’이라는 뜻을 가진 ‘Versuch’의 약자이다. 따라서 V1은 ‘1호 실험기체’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Me 262는 제트 엔진과 함께 18.5° 뒤로 젖혀진 후퇴익이 적용되었다는 점에서 고속 비행에 유리했으며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제트 전투기들보다 앞서 나갔다고 평가된다. 물론, Me 262도 처음부터 후퇴익을 사용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원래 사용하기로 했던 BMW 003 엔진이 예상보다 무거워지면서 무게 중심을 맞추고자 후퇴익이 적용된 것이다. 그래서 Me 262를 보면 날개 전체가 후퇴익이 아니라 엔진을 기준으로 바깥쪽만 후퇴익이고 동체쪽 날개는 테이퍼익이다. 하지만 이것도 1940년대 초부터 아돌프 부스만(Adolf Buseman)을 중심으로 후퇴익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실제로 아돌프 부스만은 처음에 18.5° 대신 35°의 후퇴익을 가진 Me 262 HGⅢ을 제안했으며 풍동 실험까지 진행되었지만 결과적으로 과도한 후퇴각은 양력을 감소시켜 저속 비행성능을 약화시키기 떄문에 채택되지는 못했다.
이처럼 후퇴익과 축류식 제트 엔진이라는 시대를 앞선 기술이 적용된 덕분에 Me 262는 동시에 개발된 연합군 항공기들에 비해 대략 150km/h 더 빠른 850km/h의 속도를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전후 미국으로 건나간 Me 262는 미국의 첫 양산형 제트 전투기 P-80와 비교해 비슷한 상승 능력을 보여주었고 가속력과 속도, 임계 마하수는 오히려 더 뛰어나 미국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뛰어난 성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Me 262 미래는 밝지 않았다. 우선, 기체 자체는 비교적 빨리 개발되었으나 축류식 제트 엔진이 개발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기체의 완성을 지연시켰다. 여기에 1943년 3월, 연합군의 프랑스 상륙을 의식한 히틀러가 Me 262를 전폭기로 운용하겠다는 명령이 Me 262의 운용과 도입에 큰 영향을 주었다. 물론, Me 262를 전폭기로 개조하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고작해야 기관포 2문을 더 장착하고 비행기 아래 폭탄을 탑재할 수 있도록 파일런을 장착하는 것 뿐이어서 전투기와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생산라인을 교체하면서 Me 262의 도입이 지연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1943년 12월에 창설된 Me 262 운용부대 ‘EKdo262’는 1944년 4월부터 소량의 Me 262를 운용해 7월에는 연합군 폭격기를 요격하며 소규모 작전을 개시했지만 히틀러의 명령으로 Me 262 운용에 큰 차질을 빚게 되었다. 다행히 동년 8월에 제트 폭격기 Ar 234가 배치되면서 Me 262를 전투기로 사용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을 수 있었지만, Ar 234 제트 폭격기도 Me 262와 동일한 Jumo 004B 엔진을 사용하며 엔진 소요처가 분산되는 바람에 Me 262의 생산 및 배치에 차질을 주었다. 여기에 히틀러의 명령으로 한동안 요격 훈련이 아닌 폭격 훈련만 받은 독일군 조종사들은 연합군의 폭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여기에 Me 262가 실전 배치된 지 두달 뒤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키면서 전세는 연합군에게로 완전히 기울었다. 이후 독일로 들어오는 전쟁 물자는 점점 부족해져 갔고 나날히 거세지는 연합군의 폭격으로 제대로 된 개량이나 생산 역시 어려워졌다. 특히, Jumo 004A 엔진을 만드는데 필수적이었던 니켈, 코발트, 몰리브덴 같은 내열 합금이 부족해지면서 내열 합금을 최소한으로 이용하는 Jumo 004B가 개발되었지만 내열 합금 대신 알루미늄으로 코팅한 저탄소강을 사용하면서 성능은 물론 엔진 수명이 심각하게 줄어들고 말았다.
게다가 초기 제트 엔진은 공기를 빨아들이는 힘이 약해 급격한 기동을 하게 되면 엔진이 꺼질 수도 있었기 때문에 연합군 전투기를 상대로 격한 기동을 펼쳐야 하는 공중전에는 잘 투입되지 않았다. 대신, Me 262의 빠른 상승 능력을 살린 새로운 전술로 비교적 덩치가 크고 둔한 폭격기를 요격하는 것으로 임무가 바뀌었다. 그리고 엔진의 공기 흡입력이 낮았기 때문에 가속력 역시 좋지 못해 Me 262의 가장 큰 장점인 빠른 속도에 도달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에 필요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나중에 슬랫(slat)을 장착해 일부 해결되지만, 후퇴익 때문에 저속에서의 안정성이 떨어져 낮은 가속력과 함께 이착륙 중인 Me 262는 연합군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었다.
이러한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Me 262는 이후에 등장하는 제트 전투기 개발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 중에서 Me 262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항공기는 1세대 제트 전투기를 대표하며 한국전쟁에 투입된 North American의 F-86 Sabre이다. 원래 F-86은 직선익을 가진 미 해군의 FJ-1 Fury 제트 함재기를 공군의 요구조건에 맞춰 개량한 것이었다. 하지만, 직선익을 가진 XP-86은 미 공군이 요구한 속도를 도저히 맞출 수 없었는데 이때 전후 독일로부터 들어온 후퇴익 연구 자료가 North American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후 그들은 아돌프 부스만이 처음 제안했던 35°의 후퇴각을 F-86에 적용했고 후퇴익을 적용한 F-86은 미 공군이 제시한 요구조건들을 가뿐히 뛰어넘었다. 특히, 주익 앞전에 설치된 슬랫은 Me 262의 것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었다.
한편, 1943년 말부터 유럽 전선에 투입된 장거리 호위 전투기 P-51은 독일군이 연합군의 폭격기를 요격하기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게다가 독일 공군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만가는 연합군의 폭격으로 전투기 하나 제대로 운용하기 어려웠고 조종사도 부족해져만 갔다. 그래서 독일 공군은 대량 생산을 통해 수적 열세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제트 전투기를 구상하게 되었다.
그 결과, 대량생산이 가능하며 저렴하고 부품 교체를 통해 수리 보수가 용이한 단발 제트 전투기 개발을 목표로 “국민 전투기(Volksjäger)” 계획이 등장한다. 이 계획에서 독일 공군이 요구한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우선, 대량 생산이 용이하도록 저렴하고 간단한 구조를 가지며 재료로 나무를 사용하는 등 최소한의 전략 물자만으로 제작이 가능해야 했다. 그리고 숙련되지 않은 기술자들도 생산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들기 쉬워야 했다. 마지막으로, 조종사가 부족했기 때문에 교육을 다 마치지 못한 조종사도 몰 수 있을 정도로 조종성이 우수해야 했다.
그렇게 요구사항은 1944년 9월에 구체화되었고 당연히 이번에 제작될 항공기는 독일이 총력을 다해 대량 생산할 것이 분명했기에 하인켈을 비롯해 Blohm & Voss나 Focke-wulf에서도 국민 전투기 개발에 큰 관심을 보였으나 전부터 단발 경량 제트 전투기를 개발하고 있었던 하인켈이 국민 전투기 생산 업체로 선정되면서 ‘국민 전투기’라는 이름은 He 162에게 주어졌다. 이후 국민 전투기 생산업체로 선정된 하인켈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He 162의 설계와 생산을 진행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1944년 9월 25일에 최종 형상이 결정되었는데 처녀비행이 같은 해 12월 6일에 실시되어 설계에서 제작, 시험비행까지 대략 90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He 162는 나무로 만들어진 주익을 가졌으며 엔진은 열기가 목재로 된 주익에 닿지 않도록 동체 위에 장착되었다. 그리고 조종사 한 명의 목숨이 소중했던 독일은 He 162에 사출좌석을 구비하여 He 162는 양산에 들어간 제트 전투기 중에서는 최초로 사출좌석을 갖춘 전투기가 되었다. (참고로, 세계 최초로 사출 좌석을 구비한 전투기는 He 280이며 양산형 항공기 중에서는 He 219 폭격기가 최초이다.) 그리고 엔진은 Me 262에 장착되려고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사용되지 못하고 쌓여있던 BMW 003 엔진을 재활용했고 연합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해 가구공장이나 지하에서 생산이 이뤄졌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He 162는 종전을 얼마 앞두지 않아 망가질대로 망가진 독일의 군수산업으로도 5개월동안 약 320대가 생산되었고 600대가 개발되는 중에 있었다.
이후 He 162는 1945년 2월부터 독일 공군에 인도되어 4월에는 연합군 항공기를 격추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He 162가 공군에 인도되어 조종사들이 한창 훈련을 받는 중에도 연합군의 폭격은 계속되었다. 결국, 연합군의 지칠 줄 모르는 폭격에 유루 수송망은 초토화되었고 주변 공장들이 하나둘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제작 중이거나 주기되어 있던 기체들은 연합군의 손으로 들어갔다. 게다가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He 162는 조종하기 어려웠고 연료 탑재량이 작아 비행 시간이 고작 30분에 불과했다. 그리고 나무로 만들어진 주익은 고속으로 비행하면 파손되기 일쑤였으며 Me 262에 투입될 생산력이 분산될 것을 우려한 아돌프 갈란트(Adolf Galland)는 He 162의 양산을 반대했다. 결국 1945년 5월 독일의 항복과 함께 ‘국민전투기’라는 이름으로 한껏 기대를 받았던 He 162는 눈에 띄는 실전 기록은 하나도 남기지 못한 채 연합군들에 노획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미국과 영국에서 He 162를 가져와 실제로 비행해본 결과, 초보 파일럿이 별다른 어려움 없이 조종할 정도로 조종성이 우수한 기체는 아니지만, 동시대에 개발된 Meteor와 견줄만한 성능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항공기의 성능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전쟁 말 긴박한 상황에서 운용하려다보니 제대로 된 성능을 보여주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독일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든 전세를 뒤집고자 제트 전투기를 개발하고 있을 때 영국에서도 바다 건너 독일의 제트 전투기 개발을 의식하며 제트 전투기를 개발하고 있었다.
추가로, He 162는 짧은 시간에 개발되었지만 Me 262 못지 않게 (설계도면에 그쳤지만) 다양한 파생형들이 구상되었는데 1940년대 항공기 치곤 상당히 세련된 외형을 자랑해 따로 첨부하였다. 당연히 설계 도면을 벗어나지 못한 기체들이라 실제로 제작된 적은 없어 아래 사진들은 모두 모형이나 합성이다.
* Cover image by 1_72_aircraft_news
1. Wikipedia, Messerschmitt Me 262
2. Wikipedia, Adolf Busemann
3. Wikipedia, Heinkel He 162
4. Wikipedia, BMW 003
5. Wikipedia, Junkers Jumo 004
6. Wikipedia, North American F-86 Sabre
무수천, 최초의 Me 262에는 제트 엔진이 없었다?
7. 역사 기술 우주, 제트엔진 원리, 초창기 제트엔진, 융커스 jumo 004, 미국의 제트엔진
8. 세계대전 떡밥 수용소, He 162와 나무위키 수준
9. 세계대전 떡밥 수용소, Me 262 Schwalbe 이야기 1~3
10. 아틀라스 세계사, 2차 세계대전 : 유럽 p149
11. Plane Encyclopedia, Heinkel He 162 Volksjäger
12. 네이버 포스트, Me 262 전투기
13. ThoughtCo. World War II Fighter: Heinkel He 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