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C-10은 정말 문제가 많은 여객기였을까
KC-10 공중급유기의 원형인 맥도넬 더글러스(McDonnell Douglas) DC-10 민항기의 개발은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0년대 더글러스(Douglas) C-133 Cargomaster와 록히드(Lockheed) C-141 Starlifter에 의존하고 있던 미 공군은 베트남 전쟁으로 막대한 군수 물자를 태평양 건너 베트남으로 보내야 했다. 이를 위해 미 공군은 1964년에 12만 5천 파운드의 화물을 싣고 8,000 마일을 비행할 수 있는 새로운 수송기 개발 일명 CX-HLS 사업에 착수한다. [1] 그리고 이 과정에서 록히드 C-5 Galaxy라는 초대형 수송기와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 TF39 터보팬 엔진이 개발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DC-10의 개발이 시작된다.
차세대 수송기를 위한 TF39 엔진이 개발 중이던 1966년, 제너럴 일렉트릭 공장을 방문한 아메리칸 항공 관계자는 차세대 수송기에 사용될 초대형 터보팬 엔진인 TF39 엔진을 보곤 새로운 쌍발 대형 여객기 개발을 항공기 제작업체들에게 의뢰한다. 1960년대는 유럽의 전후 복구가 끝날 무렵이었으며 지속적인 경제 성장으로 부자들의 전유물이었던 항공여행이 중산층에게도 열리는 시점이었으므로 항공 운항사들은 늘어나는 수요에 맞춰 대형 여객기를 원하고 있었다. [2] 이때 더글러스는 미 공군의 CX-HLS 사업에서 록히드에 패배한 직후였던 터라 이때 제안한 수송기 설계안을 바탕으로 2층 구조를 가진 대형 여객기 개발을 검토하고 있었다. 그러나 금전적인 여유가 없었던 더글러스는 처음부터 4발 대형 장거리 여객기 개발에 착수하는 것은 부담스러웠기에 우선은 항공사들이 원하는 쌍발의 광동체 여객기를 개발하기로 한다. 그러나 개발팀 입장에서는 새로운 항공기에 아직 검증되지 않은 신형 엔진을 탑재하는 것에 우려를 표하며 아메리칸 항공 그리고 유나이티드 항공 관계자를 찾아가 쌍발 엔진 대신 삼발 엔진 여객기 개발을 제안했다. 다행히 두 항공 운항사들은 더글러스의 의견을 수용했고, 더글러스는 이에 3발 여객기를 시작으로 어느 정도 자금력을 갖추게 되면 원래 구상했던 2층의 대형 장거리 여객기까지 출시하여 보잉에게 빼앗긴 여객기 시장을 탈환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게 된다. 여기에 1967년, 주로 민항기에 집중하고 있었던 더글러스는 자금난을 해결하고자 군용기 개발에 집중하고 있었던 맥도넬(McDonnell)과 합병하며 맥도넬 더글러스라는 거대한 회사로 새롭게 탄생한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 록히드 역시 쌍발의 대형 여객기 개발에 착수한다. 록히드 캘리포니아 사업부는 P-3 해상 초계기, F-104 전투기 생산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공장에 여유 인력이 생기자 새로운 사업을 찾는 중이었고, 그 결과 1967년 9월, 'L-1011 Tristar'이라는 신형 여객기 개발을 공식 발표한 것이다. 이에 마음이 급해진 더글러스는 구체적인 설계가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같은 해 11월 자신들 역시 신형 여객기를 개발하고 있음을 발표한다. 그리고 앞서 보았듯이 아메리칸 항공과 긴밀히 의견을 공유한 덕에 1968년 2월, 옵션을 포함하여 50대 주문을 받아내는데 성공하고, 뒤이어 유나이티드 항공으로부터 옵션을 포함하여 60대 주문을 받아낸다. 더 나아가 1972년에는 DC-10 생산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DC-8 여객기 생산 중단을 발표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록히드보다 먼저 기체를 출시하여 시장을 점유하고자 설계를 서두른 바람에 두 번째 엔진을 수직미익에 그대로 삽입하는 다소 투박한 설계를 취했으며, 저렴한 가격으로 항공사들의 마음을 사로잡게끔 개발 비용은 엄격하게 제안하여 예산을 초과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리고 어딘가 덜 다듬어진 듯한 투박한 두 번째 엔진은 이후 록히드와의 경쟁에서 승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록히드는 두 번째 엔진을 기체 후미로 부드럽게 연결했으나 이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엔진은 롤스로이스 RB211 엔진 하나로 제한되었다. 그리고 1971년에 돌연 롤스로이스가 RB211 엔진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파산하는 바람에 개발이 지연되었고, 출시될 무렵 대부분의 항공 운항사들은 DC-10을 도입한 이후였다. 반면, DC-10은 엔진을 그대로 날개에 박아버리는 설계 덕분에 설령 TF39 엔진의 민수용이었던 CF6 엔진 개발에 차질이 생겼더라도 수정할 여유가 있었다. [3]
하지만, 록히드를 제치고 계획대로 시장을 선점하는데 성공한 맥도넬 더글러스의 DC-10은 얼마 못 가 커다란 문제에 휘말린다. 1972년 6월 12일, 아메리칸 항공 96편 DC-10의 화물칸 도어가 비행 중에 떨어져 나가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사고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 화물칸 도어의 열리는 방향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여객기 화물칸 도어는 안으로 열리도록 설계되어 설령 잠금장치가 고장 나더라도 구조적으로 움직이는 문의 크기가 문틀보다 커 기압 차에 의해 열릴 수 없었다. (화물칸은 승객칸과 동일하게 1 기압을 유지하지만 외부는 1 기압보다 낮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문이 안으로 열리기 때문에 화물을 화물칸에 가득 실을 수 없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항공기 제작업체는 승객이 많아진 만큼 보다 많은 수화물을 싣고자 화물칸이 밖으로 열리는 설계를 취하게 된다. (이는 비단 DC-10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에게 유명한 보잉의 747 점보 제트기도 동일한 설계를 적용했다.) 문제는 밖으로 열리는 구조의 문은 잠금장치가 제대로 체결되어 있지 않을 경우 고도가 상승하면 기압 차에 의해 문이 그대로 열려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두 번째 문제가 등장한다. 더글러스가 아메리칸 항공의 요구사항을 반영하고자 그리고 경량화를 위해 기존 유압식 잠금장치가 아닌 전동식 잠금장치를 적용한 것이다. 전동식 잠금장치는 당시로서는 처음 적용하는 신기술이었으므로 상대적으로 신뢰성은 유압식에 비해 떨어졌다. 게다가 유압은 안으로 열리는 화물칸과 비슷하게 고장 나더라도 유압에 의해 결착이 유지될 가능성이 있으나 전동식은 고장 날 경우 아무런 저항 없이 문이 열리고 만다.
그리고 화물칸이 열린 비행기는 조종 불능 상태에 빠진다. DC-10의 경우 항공기를 조종하는 와이어, 유압 시스템 등이 화물칸 위, 객실 아래 바닥에 있다. 그리고 승객들이 탑승하는 객실은 1 기압을 유지하므로 공중에서 화물칸이 열릴 경우 기압 차에 의해 객실 바닥이 그대로 꺼지면서 와이어와 유압을 모두 끊어버린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아메리칸 항공 조종사들은 침착하게 엔진의 추력을 조절함으로써 비상 착륙에 성공했고 덕분에 승객 한 명이 안면에 부상을 입었을 뿐 탑승객 전원이 생존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에 있었다.
우선, 사고 조사 과정에서 맥도넬 더글러스는 이미 화물칸 도어 설계에 위험성을 알고 있었으며 이를 묵인한 채 양산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그리고 사고 원인에 대해 조사한 미국 연방교통안전위원회(National Transportation Safety Board, NTSB)는 맥도넬 더글러스에 첫 번째, 잠금 메커니즘을 강화할 것 그리고 두 번째, 비행기 후미에 환기구를 설치하여 화물칸이 열리더라도 환기구를 통해 기압 차를 상쇄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맥도넬 더글러스가 권고안을 잘 이행하였는지 확인하는 미 연방항공국(FAA)은 맥도넬 더글러스 고위층들과 맺은 신사 협정으로 후속 조치 여부를 확인하지 않았으며 그 덕에 맥도넬 더글러스는 설계상 반영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환기구 설치는 실시하지 않은 채 잠금장치를 강화하고 이를 외부에서 확인할 수 있도록 화물칸 도어에 자그마한 유리창을 만든 채 사고를 무마하는데 초점을 두었다. 그리고 이러한 안일한 태도는 2년 뒤 역사상 최악의 항공 사고를 낳게 된다.
[1] 혹자는 전쟁이 일어난 시점에 신예기를 개발하면 전쟁이 끝날 때 나오는 것이 아니냐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은 1964년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인 군사개입을 한 것일 뿐 한국전쟁을 계기로 공산화의 확산을 막고자 그전부터 베트남에 군비지원을 하고 있었다. C-5는 이후 1970년대 7월부터 베트남전에 투입되어 병력 수송에 사용되었으며 사이공이 함락될 때에도 많은 미국인들을 대피시키는데 투입되었다.
[2] 보통 여객기 개발은 항공기 제작업체가 시장 조사를 한 뒤 항공 운항사에 자신들의 개발 방안을 제안하는 형태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1960년대 대형 쌍발 여객기 사업은 항공기 개발사에서 흔치 않은 일이다.
[3] 실제로 DC-10의 초도비행은 1970년 8월 29일에 이뤄졌으며 록히드는 이보다 늦은 1970년 11월 16일에 이뤄졌다. DC-10은 아메리칸 항공에 의해 1971년부터 운항에 들어갔으나 록히드의 L-1011은 이스턴 항공에 1972년부터 운항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