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공중 급유의 역사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이 끝난 조종사들은 마땅한 직업을 구할 수 없는 암담한 상황에 처했다.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여객이나 항공운송과 같이 다양한 항공산업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1920년대 유럽 곳곳에서는 여러 곡예비행 서커스단이 등장하였고, 그 과정에서 공중에서 다른 항공기에 연료를 공급하는 ‘공중 급유’ 묘기가 고안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공중급유 곡예비행을 처음으로 한 사람이 바로 Wesley May이다. 그는 1921년 11월 2일, 비행 중인 JN-4 복엽기 조종석에서 약 22리터에 해당하는 휘발유 5갤런이 담긴 연료통을 등에 지고 날개를 통해 다른 비행기로 건넌 뒤 연료를 주입하는 위험천만한 묘기를 선보였다. 그렇게 그의 묘기는 처음으로 공중에서 다른 항공기에 연료를 공급한, 즉 최초의 공중 급유 사례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이는 ‘공중 급유’보다는 ‘공중 곡예’에 가까웠다. 그래서 조금 원시적이지만 현대적인 공중 급유에 가까운 방식은 러시아 전투기 조종사 세버스키(Seversky)가 출원한 특허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세버스키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한 러시아 전투기 조종사로서, 전쟁 이후에는 미국으로 망명하여 직접 항공기제작 회사까지 설립한 사람이다. 그리고 1921년에 세버스키는 최초로 공중 급유에 관한 특허를 출원했는데, 1923년 6월에 미 육군 항공대가 2대의 DH-4B 복엽기로 그의 특허를 현실에서 실현시켜 주었다. 당시 미 육군 항공대는 연료 호스를 장착한 DH-4B 복엽기 한 대에서 비행중인 다른 DH-4B에게 호스를 건네 연료를 전달하는 데 성공해냈다. 이때 총 9차례의 공중 급유가 이뤄졌으며 공중 급유를 받은 DH-4B는 무착륙 37시간 비행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 역시 저속으로 편대 비행하는 중에 한쪽에서 호스를 던져 이를 받은 조종사가 비행기에 연료를 주입하는 오늘날과 비교하면 매우 원시적인 방법이었다. 게다가 별도의 펌프도 없었기 때문에 오직 중력만을 사용해 연료를 공급해주는 방식이었다. 이 밖에도 연료를 아무리 무한정 공급해 준다고 한들 1920년대 개발된 왕복 엔진들은 장시간 작동하기에는 그 내구도가 부족해 한 번 기록 수립에 투입된 비행기의 엔진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망가지기 일쑤였다. 무엇보다 여전히 곡예비행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기에 당시 공중 급유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항공운송과 항공우편이 어느 정도 정착된 1930년대 대서양을 횡단하는 장거리 노선[1]에 적용될 수 있을 거라 기대되었던 공중 급유는 흥미로운 기술임에도 실용화될 수 없었다. 대신, 기록 수립을 목적으로 행해진 아프리카 횡단 등 장거리 비행이나 장시간 비행을 위해 사용되었다. 1930년대를 지나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은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 본토를 공격하기 위해 공중 급유 기술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이는 B-24 폭격기를 공중 급유기로 개조해 B-17 폭격기의 항속거리를 늘리려는 시도에서도 잘 드러난다. 게다가 이는 긍정적인 결과를 보여주었다. [2] 그러나 1943년 중반에 B-17 폭격기의 2배에 달하는 폭탄 탑재량을 가지면서도 1,500 마일의 항속거리를 가진 B-29 폭격기가 등장했고, 미 해군이 태평양에서 제해권을 잡으면서 공중 급유 기술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등장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1940년대 초에 나타나 빠르게 자리를 잡아가는 제트 엔진의 등장으로 공중 급유의 필요성이 다시 한번 대두되었다. 제트 엔진은 엔진 내부에서 공기를 압축하기 때문에 왕복 엔진에 비해 고고도 비행 성능이 우수했고 왕복 엔진을 상징하는 프로펠러가 없어 왕복 엔진이 가진 태생적인 속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초기 제트 엔진은 연비가 매우 낮아 장거리 비행이 불가능하였으므로 제트 엔진의 낮은 연비를 해결해줄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다. 여기에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핵폭탄의 등장도 공중 급유 기술에 대한 관심을 증가시켰다. 일본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떨어진 핵폭탄의 위력을 본 강대국들은 핵폭탄만 있으면 상대방을 무력화할 수 있다는 ‘핵 만능주의’에 빠지게 되었고, 앞다투어 핵폭탄 개발에 나섰다. 그리고 1957년에 소련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쏘아올리며 대륙간탄도미사일의 시대를 열기 전까지 유일한 핵 투발 수단은 전략 폭격기뿐이었다. 그리고 핵무기는 그 특성상 보안이 중요했으므로 미 본토에서 관리되어야만 했다. 따라서 미 본토에서 무거운 핵폭탄을 싣고 이륙한 뒤 당시 가상의 적국이었던 소련의 모스크바에 핵공격을 실시하고 돌아오기 위해서는 고고도 장거리 비행이 필수적이었다.
[1] 독일의 Focke-Wulf Fw200 Condor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인 1938년 8월에 베를린에서 뉴욕까지 무착륙 비행에 성공한 기록이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대서양을 횡단하는 것을 넘어 많은 승객을 싣거나 군용기의 경우 폭탄을 탑재하면서 대서양을 횡단할 수 있는 형태를 고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2] 1943년 중반에 공중급유기로 개조된 B-24D와 공중 급유를 받을 수 있도록 개조된 B-17E 폭격기가 시험적으로 제작되었다. 공중 급유를 받은 B-17E 폭격기는 항속거리가 기존 1,000 마일(1,600 km)에서 1,500 마일(2,400 km)로 증가했다. 해당 프로젝트로부터 고무된 미 육군 항공대는 B-29 폭격기에도 공중 급유를 시도하였으나 항속거리를 고작 830 마일(1,300 km) 정도 늘려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