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물>의 사전적 의미가 '과일, 푸성귀, 해산물 따위에서 그해의 맨 나중에 나는 것'으로 '끝물 고추, 끝물 참외' 따위로 쓸 수 있습니다. 또 '활발하던 기세가 사그라드는 시기 또는 그런 것'이란 의미로 읽히면 '부동산 시장 호황의 끝물' 할 때 그 끝물입니다.
그럼 혹시 <끝물 인생>이란 말은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희망에 부풀어 막 덤볐는데 시작하자마자 종말을 맞는 황당함이 뭔가를 시도할 적마다 저주처럼 따라다니는 운이라고는 지지리도 없는 인생을 빗대 내가 지어낸 단어입니다.(혹시 이 단어가 그 전에 쓰인 적이 있다면 제게 알려 주십시오. 굳이 저작권을 주장할 마음은 없지만 기왕 쓰였다면 또한 깨끗하게 인정하겠습니다. 글줄 좀 끼적대는 족속들의 고질적인 단어 집착증이니 너그러이 용서를 바라며.)
1997년 IMF 사태 직전에 공채로 입사한 보험회사에서 채 몇 달 안 가 같은 부서 공채 동기들서껀 본사 사옥 옥상에 불려가서는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인원은 두말없이 사직한다는 공포스러운 권고를 받는, 이른바 몸통은 냅두고 애꿎은 꼬리만 자르는 식 인원 감축의 대상으로 전락했던 게 끝물 인생의 서막이었습니다.
팔자에도 없는 장사를 해보겠다고 부산 민락동 포구에서 무허가 포장마차를 인수한 적이 있었습니다. 포장마차와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드넓게 펼쳐진 공터가 십수 년 동안 방치된 채 소문만 무성하다가 내가 일 좀 해보겠다는데 공교롭게도 아파트 건설 부지로 확정됩니다. 개시하자마자 철거를 염려하는 신세가 되어버린 거죠.
지인이 어렵게 마련해 준 자리, 요양병원을 운영하는 생활협동조합 사무국의 최저임금만 준대도 감지덕지했던 사무직,도 병원 살림에 불가결한 최소 환자 수를 못 맞추는 경우가 비일비재해 들어간 지 얼마 안돼 병원이 폐업을 선언하는 바람에 속절없이 나오질 않나, 기술다운 기술을 익히자면 최소 1년 이상은 그 문하에서 꾸준하게 배워야 하는데 학원 들어가고 다섯 달 만에 50년 외길 인생이라던 마스터(학원 원장)가 나이(일흔 넷)와 건강(우울증 증세) 문제로 학원을 홀랑 넘기는 바람에 끝물 인생의 끝은 어디인가 하고 심각하게 고민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글을 이렇게 끝을 내면 박복한 인간의 전형이라 낙인이 찍혀 정작 글을 쓰는 의도와는 영 다르게 역효과가 날 것 같아서 노파심 때문에라도 몇 자 더 보탭니다.
맞닥뜨린 각각의 끝물 국면에서 같이 허우적댔던 사람들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그들은 어쩌면 나보다 더했으면 더했을 박복에 몸서리쳤을지 모를 일입니다. 풀릴 기미가 안 보이는 제 팔자를 두고 넋두리를 일삼던, 새삼 다시 돌이켜 본들 흐릿한 윤곽만이 어슴푸레 기억 날 뿐이지만 그 때 그 사람과 그 사연 사연들을 낚은 고기를 꿰미에 꿰듯 하면 장편소설 서너 권은 너끈하고도 남습니다. 가만있자, 장편소설이라... 그렇습니다. 이왕지사 끝물 인생이라고 광고를 해댈 요량이면 끝물 국면마다 봉별한 필부필부를 등장시켜 그들 사연을 진탕 풀어 놓으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걸로 책을 내는 날, 마침내 불운했던 끝물 인생에 종지부를 찍고 영광되고 지속가능한 후반생을 위한 씻김굿의 제물로 삼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미칩니다.
좀 더 부연하자면, 허구인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아주 없는 이야기를 지어낼 상상력은 빈약하지만 있을 법하거나 겪었던 경험담을 기초로 해 거기에 약간의 상상을 곁들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 식 트릭, 반전, 에스에프적 요소를 양념처럼 가미시키면 재밌겠다고 미친 놈마냥 혼자 즐거워합니다.
그렇다고 사기충천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말이 쉬워 소설이지 아무나 쓰면 그게 어디 소설이겠습니까? 괜히 말만 꺼내고 유야무야하지나 않을까 두렵기도 합니다. 그래도 한 번 도전해볼라고요. 지긋지긋한 끝물 인생의 마침표를 찍겠다는 일념은 생각보다 사람을 독하게 만듭니다.
사족- 오늘 생이빨을 두 개씩이나 뽑았습니다. 이빨 건강이 총체적 난국이라 부득불 발치라는 고강도 조치를 취했습니다만 오늘로 그칠 일이 아닙니다. 앞으로도 여러 날에 걸쳐 여러 개 더 뽑아야 한다는 얘기지요. 이 글은 아침에 이 뽑으러 치과에 가면서 끼적대기 시작해서 뽑은 뒤 극심한 진통 때문에 약 먹고 한숨 자려는 이 순간에 대충 끝냅니다. 그래서인지 암만 봐도 쓰다 만 기분이 다분해 영 찝찝합니다. 하다 말면 안 하니만 못하다는 선인들의 말씀이 통렬합니다. 아플 땐 찌그러져 있는 게 상책인데 그게 잘 안 됩니다. 심심하면 가만있질 못하는 병은 필시 정신병의 일종일 겝니다.
송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