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얼개

by 김대일

부산 원도심의 어느 동네라고 해두겠습니다. 비탈이 약간 진 동네의 그 가게로 가자면 가까운 지하철역에서 걸어가면 10여 분 이상, 시내버스나 마을버스를 타도 두어 정거장은 가야 하는 수고로움이 듭니다.

<덕궁德窮 이발소>

이 촌스러운 가게에서 이발을 하면 덕이 극에 달하는 행운을 누릴지 있는 덕까지 탈탈 털려서는 궁상을 떨지 가게 이름만으로는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내가 앞으로 전개할 이야기의 주 배경이자 주인공은 이 <덕궁 이발소>를 운영하는 김 씨입니다. 그 가게 안에서 벌어지는 자잘한 사건들이 이야기의 골자가 될 겝니다.

이발소를 배경으로 한다니 오쿠다 히데오의 『무코다 이발소』가 떠오를 분이 계실 겁니다. 아류라고 해도 딱히 반박하진 못하겠습니다. 한 동네 안에서 벌어지는 등장인물들의 유쾌한 좌충우돌기 하면 김호연의 『망원동 브라더스』도 빼놓을 수 없겠지요. 하지만 나는 아베 야로의 『심야식당』을 닮고 싶습니다. 심야식당처럼 밤에만 여는 이발소에서 온갖 인간 군상들을 등장시켜 그들의 희노애락을 담담하게 그리고 싶단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사연 안에다가 히가시노 게이고 식 트릭과 가슴 뭉클한 반전을 집어넣어 재미를 더하고 싶습니다.

요즘 히가시노 게이고 책을 섭렵하는 중입니다. 추리소설을 즐겨 봐서가 아니라 그의 작품을 통해 소설이라고 하면 무릇 이래야 한다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계시 받았기 때문입니다. 히가시노는 추리적 재미를 바탕으로 너무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 사회의식적이지도 사건 트릭 위주도 아닌 모호한 지점에서 자유자재로 '인간'에 대해 이야기할 줄 아는 진정한 '이야기꾼'의 면모를 지녔습니다. 홍명희의 『임꺽정』 말고는 히가시노에 필적할 재미와 감동을 받은 우리나라 소설을 나는 안타깝게도 기억해내지 못합니다. 하여 그의 작풍作風을 내면화할 수만 있다면 나도 재미와 감동을 버무린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속내입니다. 그게 비록 조족지혈일망정.

영감이 떠오르면 메모부터 하고 보는 요즘입니다. 천성적으로 상상력이 빈약한 관계로 이야기의 글감이 될 만한 에피소드는 아마 거개가 내가 만났고 겪었던 사람이나 사건에서 비롯되거나 우연히 다른 사람을 통해 들었는데 잘만 꾸미면 흥미진진할 성싶은 것들 따위겠습니다. 지금은 구상하고 수집하는 착수 단계이긴 한데 내 돌발적이고 즉흥적인 성정으로 미루어 보건대 정해진 수순을 차근차근 밟아 나가서 글로 이어질 가능성은 별로 없겠습니다. 차라리 메모를 하던 도중에 독수리가 먹이를 채듯 머릿속에서 뭔가가 탁! 걸리는 순간, 앞뒤 안 재고 써재낄 공산이 큽니다.

그러니 내가 본론은커녕 잔사설만 죽 늘어놓는 까닭을 쉽사리 눈치 챘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벌써 몇 달째 탁! 하고 채 갈 만한 뭔가를 못 느껴서 이리 설레발만 요란한 거죠. 오늘까지 쓴 메모를 살짝만 보여 드릴까요? 당신이라면 쓰다 만 메모를 어떻게 마무리 짓겠습니까?

첫 번째, 이발소가 있는 건물은 3층 건물이고 2층에는 김 씨에게 이발 기술을 전수한 이 원장이 운영하던 이용기술학원입니다. 김 씨와 이 원장 사이에 사연이 없을 수 없습니다. 갑작스런 원장의 변고, 교도소, 마음의 빚, 질긴 인연 따위가 미스테리로 버무러져야 이야기 맛이 살아날 겁니다. 나열한 것들을 개연성 있게 꿰는 게 관건입니다.

두 번째, 그 학원의 수강생 중에 온몸에 문신을 한 스무 살짜리 사내가 있는데 그는 해군 이발병 입대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근데 그는 가족들과의 관계가 복잡 미묘합니다. 부모 이혼, 기혼이지만 자식이 없는 고모의 극성스러운 참견과 집착, 그 고모에 대한 반항, 잠적, 홀로서기가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키워드입니다.

세 번째, 첫사랑을 우연히 만난 중년 남자는 단골 이발소 주인인 김 씨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습니다. 그런데 그 첫사랑도 자기 아들 머리카락을 깎으러 그 이발소를 찾습니다. 말하자면 한 동네 주민이었다는 거죠. 우연히 재회한 두 사람 사이 이야기를 끌고 갈 매개는 신승훈 2집 CD와 수록곡인 <보이지 않는 사랑>, 엇갈린 사랑, 광산, 노래 제목처럼 보이지 않는 사랑입니다.

네 번째, 입주 요양보호사인 55세 남자는 한 달에 두 번 휴가를 받는 날에는 어김없이 이발소영업이 끝나는 새벽 1시쯤 찾아와 이발을 청합니다.(이발소는 오후 6시부터 다음 날 새벽 1시까지 여는 걸로 상정했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낮보다 밤이 사람을 이야기하는 데 어울릴 것 같아서요.) 과묵한 그가 하루는 머리를 깎다 말고 통곡을 합니다. 그 까닭을 알아가는 게 주요 내용입니다. 나이듦, 은퇴, 간병, 죽음이 이 에피소드의 주 테마입니다.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일전에 언급했던 끝물 인생을 불러내 하나씩 그려나가다 보면 소재가 없어 중단될 리는 없겠습니다. 대단히 걱정스러운 건 재미랄 것도 없는 내용에 밋밋한 글자의 나열로만 그친다면 안 하니만 못한 꼴이 되니 재미를 담보할 한 방을 에피소드마다 끼워 넣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결코 쉬운 작업은 아닐 거라는 예상입니다. 한번 물어봅시다. 만약 당신이라면 내가 예로 든 첫 번째부터 네 번째 메모를 보고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겠습니까? 댓글을 달아 주면 참고하겠습니다. 혹시 슬쩍 베끼지 않을까 염려되십니까? 나요, 그렇게 후안무치한 놈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이런 메모로 다른 사람은 요렇게도 조렇게도 상상하는구나 하고 말 그대로 참고하겠다는 거지 흑심 따위 전혀 없다는 점을 확실히 해두죠. 사람을 뭘로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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