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평민 프로젝트

by 김대일

역병이 살짝 소강상태였던 작년 한여름 어느 날, ROTC를 인연으로 오래 알고 지내는 동기, 선후배 일여덟 명이 말미잘 탕이 유명하다는 부산 일광 방파제 앞 횟집에서 한 잔 할 때였다. 나보다 두 학번 위이고 모임의 좌장 격인 변 형이 "앞으로 우리가 만나면 몇 번이나 더 만나겠니?"라면서 운을 뗐다. 말인즉 오랜만에 만났으니 지금-여기를 즐기자는 일종의 변주된 권주가였음에도 비장하게 들린 나는 괜히 숙연해졌다.

참석한 이들의 평균연령을 40대 중후반으로 잡고 대한민국 남성의 평균여명을 80세라고 치면 해마다 꼬박꼬박 만난대도 재회는 마흔 번이 채 안 된다. ‘꼬박꼬박’이라는 전제를 달았지만 세상사가 제 뜻대로 되지 않으니 그 횟수는 더 줄어들 수밖에 없다. 혹여 풍운과 박복의 소용돌이에서 헤맨다면 다시는 영영 못 만날지 모른다는, 어쩌면 그 자리가 그 사람과는 최후의 만찬일지 모른다는 우울한 상상에 이르자 술맛이 갑자기 씁쓸해졌다.

나이가 들면서 뭔가를 꼭 남겨야겠다는 집착이 사람을 조급하게 만든다. 돈, 땅, 건물하고는 애당초 거리가 머니 그건 무조건 패스. 한때 친구라면 사족을 못 써 날 한번 제대로 잡았다 싶으면 웃고 떠들고 마시고 부르며 밤새 질펀하게 놀았다. 그 친구들(오래 만난 선후배 역시 같이 늙으면서는 너나들이하는 사이로 변질하는 법)이 삶의 원동력이자 샘솟는 활력의 발원이었다. 귀밑머리에 파뿌리 같은 흰 털이 주체하지 못할 지경에 이른 나이가 됐음에도 그들 존재의 의미는 여전히 퇴색하지 않았다. 다만 오랜 격조를 타파하고자 성사된 참으로 금쪽같은 재회라면 이제부터는 권커니 잣커니 권주가로 허송하고 싶지 않다.

대신에 적년회포도 풀고 마른 정신이 유들유들해질 만큼만 마신 후 은은한 분위기의 다방(써놓고 보니 시대역행적이군. 커피 체인점이 더 어울리겠다. 아무려나)엘 들르자고 꼬시겠다. 어색해하는 그를 진정시키고 나서 나는 우리 사이의 옛일을 회상하고 격조한 탓에 공백이 생겨 버린 그의 그간 행적을 밝혀 달라 정중히 요청하련다. 그래서 그날 밤하늘 은하수처럼 펼쳐질 주옥같은 그의 언어를 토씨 하나 빼먹지 않고 어떡하든 기록으로 남기는 바지런을 떨 테다. 내가 더는 내 기억을 믿지 못하는 날이 닥쳤을 때 그걸 펼쳐 평범한 사람의 특별한 영웅담에 감동하며 사람에 관한 기억들을 반추하며 여생을 즐기기 위해.

2021년 2월 2일자 한겨레신문에는 충북 괴산 송면중학교의 학생들이 마을 전기 『여기 우리 꽃』(도서출판 고두미)을 냈다는 기사가 있었다. 책은 전교생 21명이 지난 1년 동안 진행한 ‘위대한 평민 프로젝트’(위평프)의 산물로, 평범한 듯 보이는 이웃의 삶 또한 위대하다는 데서 출발한 인터뷰·글쓰기 체험이다. 학생들이 글을 쓰고, 담당 교사가 사진을 곁들여 책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나도 <우리들의 만인보>라고 해서 위평프 비스무리한 짓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시절은 서로 만나지 않는 게 미덕이 되어 버렸고 내 게으름이 이에 편승하고부터 흐지부지됐다. <접시꽃 당신>의 시인이자 교사 출신인 도종환은 '가장 특별한 사람은 가장 평범한 사람이다. 그런 위대한 평민이 바로 내 옆에, 우리 집에, 내 이웃 중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이 책의 위대한 힘'이라고 축사에서 밝혔다. 학생들이 부럽고나!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위대한 평민의 위대한 힘을 벌써 알아차렸으니.


http://www.hani.co.kr/arti/area/chungcheong/98134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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